두려움, 상처를 대하는 법
감독은 자신이 어린 시절에 당한 성범죄를 바탕으로 연극 les chatouilles ou la danse de la colère (간지럼 혹은 분노의 춤)을 만들었고 그 작품으로 상을 받는다. 그녀는 연극 연출자와 함께 이것을 영화로 재탄생시키고 영화 역시 각종 영화제에서 좋은 평가를 받는다. 감독은 자신을 직접 연기하는데, 죄책감, 불안, 분노, 연민, 비난등의 감정을 지나 모든 것을 소리 내어 말하고 그것을 심지어 예술품으로 재생산해내는 용기와 삶의 의지가 참 아름답다고 느꼈다.
영화는 주인공의 감정을 춤으로 표현하고 현실과 환상을 오간다. 아동을 상대로 한 성범죄라는 끔찍한 주제에도 불구하고 신파의 리듬을 따르지 않는다. 강렬하고 빠른 장면 전환, 편집에서 느껴지는 냉소, 그리고 주인공이 지독하게 느꼈을 온갖 부정적인 감정을 표현해내는 춤. 근육이 다부진 그녀의 팔처럼 강하고 다부진 영화였다.
프랑스 문화의 흥미로운 면모 중 하나는 무언가에 대한 전형이 없다는 것이다. 사고와 영역이 자유로운 편인데, 영화에 연극도, 춤도, 미술도, 시도 들어갈 수 있다.춤과 노래가 들어가는 뮤지컬 영화와 무엇이 다르냐고 묻는다면, 일련의 뮤지컬 영화들은 노래와 춤을 영화를 만들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반면, 이 영화의 춤은 영화 그 자체로 존재한다. 그들에게는 경계와 영역이라는 것이 의미가 없다. 이러한 성향은 행정이나 정치에도 반영되어 다양함을 보장한다. 어쨌든 전형을 벗어나 자유로운 작품들은 환상적이고 좋은 자극을 준다. 닫힌 뇌와 마음이 열리고 거기서 희열을 느끼게된다. 아마 만드는 사람도 그런 기분이겠지.
자식으로만 살다가 부모라는 역할을 하게된지 얼마되지 않았다. 부모라는 자리는 나의 많은 것을 바꾸어놓았는데 특히 많은 것을 부모 입장에서 감상하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아이는 내게 모든 것을 말하지 않는다.
나는 아이가 아니다.
아이가 겪고 느끼는 것을 내가 정확히 다 알 수는 없다.
아이의 두려움 중에는 내가 대신 해결해 줄 수 있는 것, 그리고 해결해 줄 수 없는 것이 있다.
그렇다면 나는 아이의 두려움을 대신 해결해주는 대신, 그것을 마주할 수 있는 용기가 아이의 가슴에도 존재 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그것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힘이 들 때 쉴 수 있는 품을 열어 두어야 한다.
아이가 괴로워하는 것을 곁에서 보는 건 힘들 일이다. 아니, 힘든 일이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다. 더 깊고 어둡고 아픈 감정이다.
그리고 나는. 나는 나의 두려움과 함께 가고 있는가. 그것을 애써 외면하고 벽장에 숨겨두지 않았는가. 그것을 꺼내어 마주보고 함께 걸을 생각을 해보았는가.
프랑스에 온 이후로 도망치는 삶을 살았다. 어떤 끝에 다다랐을 때 더이상 도망칠 곳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피해온 대상을 깊숙이 숨겨두고 없는 척 하며 지냈다.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어두운 곳에서 나를 보고 있었다.
두려움을, 상처를 드러내는 방식은 저마다 다르다. 누구는 행위를 통해 그것을 드러낸다. 그 행위는 폭력이 될 수도 있고, 음주가 될 수도 있고, 춤이 될 수도 있고, 글을 쓰는 행위가 될 수도 있다. 누구는 그것을 안으로 삭힌다. 혼자서 아무도 보지 않을 일기를 쓰거나, 아무도 모르게 자해를 하거나, 아무도 모르게 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모든 방식은 두려움이나 상처의 직접적 원인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 모든 것은 그저 도망가는 행위일 뿐이다.
두려움이나 상처를 정면으로 표현하거나 말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것이 본인에게 무게가 클 수록 더 그렇다.
영화의 주인공은 마지막에 자신의 두려움과 상처 앞에 선다. 그리고 그 동안 모른척해서 미안하다고 말하고는 그와 함께 어디론가 나아간다.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이 장면에서. 내 두려움과 상처를 숨겨둔 나의 비겁함이 슬퍼서. 그리고 이 만큼 용기를 내기까지 그녀가 걸어왔을 길이 슬퍼서. 그리고 그녀의 용기가 아름다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