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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로 Apr 12. 2023

당근 하러 나갔다가...(2)

가장 두려운 것

구파발천의 막바지가 곧 창릉천의 시작이었다. 창릉천은 개방감이 있으면서도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언젠가 한번 큰비에 있는 거 없는 거 다  내려간 것 같은 느낌의 하천이었다. 그래도 그날 창릉천을 걷는 건 좋았다. 창릉천 위로 정말 밝고 커다란 달이 하천과 나를 비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달은 계속해서 나를 따라왔다. 아니 자기를 따라오라고 하는 것도 같았다. 그래서 그런지 그때까지는 아무 걱정 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계속 걸었다. 나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고 건강한 마음을 품고 운동하는 사람들이 간간히 지나다녀서 늦은 시간이었음에도 무섭지 않았다.



평탄대로였던 길을 2시간을 더 걸으니 멀리서 원당역의 간판이 보였다. 원당역의 간판을 보자 집에 가야만 하는 몇 개의 리스트들이 촤라라락하며 순식간에 떠올랐고 마음을 어지럽히기 시작했다.



내일 중요한 스케줄도 있는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오밤중에 이러고 있느냔 말이야.... 지하철 타면 순식간에 바로 집인데..... 그래 맞아.! 집에 불도 환하게 다 켜두고 나왔어... 고양이 밥은 충분히 있나? 설마 수돗물을 틀어놓고 나온 건 아니겠지? 창문이 열려 있을지도 모르는데... 아... 다리에 이제 조금 느낌이 오는데... 3시간의 산책이면 충분해... 앞으로 4시간을 더 걸어야 하는데 그건 무리야...


 저녁 9시부터 2시간을 더 왔으므로 그때의 시간은 거의 11시에 가까워져 있었다. 간간히 뛰기도 해서 시간을 조금 단축하기도 했지만 원당역을 지나면 이제 내게서 지하철역은 꽤 멀어진다. 만일 변수가 생겨 다시 지하철을 타고 싶어도 멀어서 못 타고 돌고 돌아 도착하더라도 너무 늦은 시간이라 탈 수 있는 지하철도 곧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원당역을 지나치면 곧장 직진만 보고 걸어가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원당역과 일산 시가지까지 약간의 거리가 있는데 지도상으로 판단하기에는 거의 허허벌판이거나 완전한 도로변, 아니면 도로가 야산을 지나는 길 같아 보였다. 그곳이 가장 문제였다.


가다가 인도가 끊겨버리고 갑자기 도로가를 걸어야 하는 상황이 나오면 어떻게 하지... 낮이면 상관없겠지만 아닌 밤중에 도롯가를 걷는 정신 나간 사람들의 괴담을 내가 만들지도 모르겠다는 상상이 이어졌다. 하지만 내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시나리오는 이랬다. 길을 가다가 갑자기 인도가 끊겨버렸고 가로등도 없다. 그래도 핸드폰이라는 실낱같은 희망이 있으니 그것에 의지해 계속 걸었지만 그렇게 절전모드로 사용을 하고 지도만 펼쳐보았는데도 3년이 다되어가는 핸드폰 배터리는 순식간에 나가버린다. 나는 어두컴컴한 도로에서 경찰서에 연락을 할 수도 없을 것이다. 게다가 아무런 준비도 없이 나선 길이라 지금 신고 있는 이 스니커즈가 다리를 너무 아프게 한다. 핸드폰 불빛도 없이 다리도 풀린 나는 어딘가에 주저앉고 마는데.... 하필 지나가던 멧돼지 가족과 만나거나... 아니면.... 그 어둠속에서 사람을 만난다거나....!!!!!


밤 11시..... 늘 안전을 추구하는 당신이라는 사람은 집에 가는 게 정상입니다. 심지어 내일 스케줄도 있지 않나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하세요.!

머릿속에서 누군가 내게 다그치듯 물었다.




나는 원당역 아래 버스를 기다리며 늦은 퇴근을 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들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림자만큼 내 머릿속에 난무하는 온갖 상상들은 어스름한 밤만큼이나 나를 까맣게 물들이고 있었다. 버스들의 노선도를 흘낏 보면서 혹시 목적지가 파주언니네 집 근처 어디쯤은 아닌지 본능적으로 빠르게 살폈다. 만일 정확히 언니네 집 앞으로 가는 버스 노선을 봤더라면 잔뜩 겁을 집어먹은 나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몸이 먼저 움직여 버스를 탔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내 머리속을 펄쩍펄쩍 뛰어다니는 상상들을 진정시키며 버스정류장 옆의 사람들을 지나쳤다. 곧 집으로 바로 갈 수 있는 KTX격인 원당역 아래를 지나며 나는 되도록 이면 앞만 보고 걸으려고 노력했다. 그때에는 오히려 그렇게 날뛰던 상상력들이 원당역 아래에서 오히려 조용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마음 어딘가에서 조용히 결정이 내려졌다.


수많은 이유와 상상이 내 발목도 붙잡고 손목도 붙잡고 머리채도 잡고 있었지만 단 한 가지 더 큰 두려움이 나를 멱살 잡고서는 내 눈앞에 놓인 어둠이 짙게 깔린 길을 계속해서 걷게 하였다.  


이곳에서 멈춰서 버리면 다음에도 이곳에서 멈춰 설 것만 같은 두려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질 못할 것 같은 철창 속에 갇힌 마음

내 영혼이 영원히 원당역에 묶여 있을것 같은 불길함을 동반한 느낌



사실 이 두려움의 실체는 내가 오랫동안 고민해 온 두려움이었다. 아직 넘어서지 못한 현재진행형의 고민. 

그날 세상을 환히 밝힌 달아래 원당역 앞에 선 나는 오랜 고민의 답을 해야만 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등뒤로 환하게 불 밝힌 원당역을 한번 쳐다보고는 계속해서 걸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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