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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연 Jul 16. 2021

진정한 화수분

추억은 힘이 세다





가끔 출처도 알 수 없이 갑자기 흥얼거리게 되는 곡들이 있다.     

어느 날 내 입술이 나를 사로 잡아 나를 어떤 노래 앞에 데려다 놓았다.

(수동태 쓰면 좋지 않은 글이라고 하지만, ‘화려한 조명이 나를 감싸네’처럼 읽어주시길.) 


    

‘파란 하늘 서울 하늘 헛기침 소리 에헴 에헴

휘파람 댕기바람 신선한 바람

고무신에 팔자걸음 뒤뚱거린다 

머리 땋고 댕기 땋은 댕기 동자님

댕기 댕기 댕기 동자‘     




아니 이게 대체 무슨 노래길래 내가 알고 있는거지? 순간 등골이 오싹하여 검색해봤더니, 무려 89년도에 mbc에서 방영한 ’댕기 동자‘라는 드라마의 오프닝 곡이란다. 이때는 내가 너무 아기일 때라 설마 본방 사수는 아닐 테고, 비디오 테이프로 빌려보지 않았나 싶다. 도대체 주제곡을 어떻게 완창할 수 있는 걸까 여전히 미스테리지만.     




이렇게 장기기억 속에 숨어 있던 기억들이 가끔 수면 위로 올라 올 때면 그 기억과 함께 저장된 정서, 느낌도 함께 떠오르곤 한다.      




친구와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게 놀다 하염 없이 바라봤던 노을진 하늘. 

빨간 노을과 달콤한 냄새의 공기. 가슴이 저릿하니 무언가 이상했던 그 느낌.

땀냄새 풀풀 풍기며 아파트 1층 계단을 밟을 때의 차갑고 습한 공기.

만화를 실컷 보다, 엄마가 부엌에서 만들고 계시던 반찬 냄새를 맡고 쪼르르 달려가 바로바로 손으로 집어먹던 기억.

별 것도 없는 공터에서 동생과 실컷 뛰어놀다 자동차 뒷 좌석에서 엄마 무릎을 베고 잠들었을 때의 그 노곤함. 

내 머리를 무릎에 눕히고 아무 말 없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던 그 따뜻함과 편안함.     

창문으로 쏟아지던 햇살, 머리칼을 쓰다듬는 엄마의 손길.

노곤함, 따뜻함, 엄마 무릎, 엄마 냄새.      





나의 어린 시절은 추억 지뢰밭이다. 어떤 사소한 일상에서도 어린 시절의 풍성한 추억을 소환해 온다. 한번 건들면 어디서든 다 터지니 말이다.      


화수분.      



재물이 계속 나오는 보물단지로 그 안에 온갖 물건을 담아 두면 끝없이 새끼를 쳐 그 내용물이 줄어들지 않는다는 가상의 단지라고 한다.      

부모가 줄 수 있는 진정한 화수분은 바로 유년 시절의 풍성한 추억과 따뜻한 기억들이 아닐까.     



어른이 되어 맞서야 할 세상은 결코 아름답지만은 않다. 현실의 나는 어릴적 본 만화처럼 해적왕도 아니며, 매일 모험을 떠나며 괴물을 물리치는 힘센 영웅도 아니다. 녹록하지 않은 현실에 매일 부딪치며 살아가는 애처로운 자다.      




그래도 나에게는 진정한 화수분이 있다. 영웅은 아닐지라도, 추억의 힘을 매일 누리는 강한 자다. 단단히 딛고 있는 이 시간과 공간에도 여전히 후회 없이 꿈꾸고 아낌없이 즐길 수 있는 힘이 있다. 생각하는 것 만으로 단전에서부터 힘이 불끈 솟고, 어디선가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은 추억이 많은 부자니까. 퍼 올려도 퍼 올려도 동나지 않는 어린 시절의 따뜻한 기억으로 별 것 없는 오늘 하루도 유쾌하고 명랑하게 살 수 있는 작은 영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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