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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경 Jun 18. 2021

소리 없는 울음을 우는 밤과 아침

최정례 - 레바논 감정


  수박은 가게에 쌓여서도 익지요

  익다 못해 늙지요

  검은 줄무늬에 갇혀

  수박은

  속은 타서 붉고 씨는 검고

  말은 안 하지요 결국 못하지요

  그걸

  레바논 감정이라 할까 봐요


  나귀가 수박을 싣고 갔어요

  방울을 절렁이며 타클라마칸 사막 오아시스

  백양나무 가로수 사이로 거긴 아직도

  나귀가 교통수단이지요

  시장엔 은반지 금반지 세공사들이

  무언가 되고 싶어 엎드려 있지요


  될 수 없는 무엇이 되고 싶어

  그들은 거기서 나는 여기서 죽지요

  그들은 거기서 살았고 나는 여기서 살았지요

  살았던가요, 나? 사막에서?

  레바논에서?


  폭탄 구멍 뚫린 집들을 배경으로

  베일 쓴 여자들이 지나가지요

  휑한 눈을 번뜩이며 오락가락 갈매기처럼

  그게 바로 나였는지도 모르지요


  내가 쓴 편지가 갈가리 찢겨져

  답장 대신 돌아왔을 때

  꿈이 현실 같아서

  그때는 현실이 아니라고 우겼는데

  그것도 레바논 감정이라 할까요?


  세상의 모든 애인은 옛애인이 되지요*

  옛애인은 다 금의환향하고 옛애인은 번쩍이는 차를 타고

  옛애인은 레바논으로 가 왕이 되지요

  레바논으로 가 외국어로 떠들고 또 결혼을 하지요


  옛애인은 아빠가 되고 옛애인은 씨익 웃지요

  검은 입술에 하얀 이빨

  옛애인들은 왜 죽지 않는 걸까요

  죽어도 왜 흐르지 않는 걸까요


  사막 건너에서 바람처럼 불어오지요

  잊을 만하면 바람은 구름을 불러 띄우지요

  구름은 뜨고 구름은 흐르고 구름은 붉게 울지요

  얼굴을 감싸쥐고 징징거리다

  눈을 흘기고 결국


  오늘은 종일 비가 왔어요

  그걸 레바논 감정이라 할까 봐요

  그걸 레바논 구름이라 할까 봐요

  떴다 내리는

  그걸 레바논이라 합시다 그럽시다



* 박정대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 애인이지요」중에서


최정례, 레바논 감정 (全文)



  감정에 이름표를 붙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정도면 무르익었다 싶어 한편에 쌓아둔 뒤에도 익어가고, 그것도 모자라 늙어가기 때문이다. 그래도 (혹은 그래서) 감정은 말이 없다. 어쩔 수 없다. 수박 속이 붉은 건 타버려서 그렇기도 하지만, 그냥 수박 속이라서 그렇기도 하다.

  그러나 이름을 붙여도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그 이름은 아직도 나귀가 교통수단인 나라만큼이나 낯설고, 갈매기가 불시착해버린 사막만큼이나 혼란스럽기 때문이다.

  될 수도 없을 무언가가 되려고 살다 보면 어김없이 폭탄이 떨어진다. 그러다가 죽는다.

  그러게 정성껏 쓴 편지가 대체 어찌 될 줄 알고 보낼 생각을 했어? 죽지도 않고, 죽어도 흐르지 않는 당신에게. 옛 애인에게. 어쩔 수 없었지. 나는 발신자, 당신은 수신자니까. 소리 없는 울음을 우는 밤. 그런 밤과 그런 아침. 그걸 부재중 발신 감정이라고 불러도 될까? 잠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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