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똘히 생각해본다. 유감스럽게도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렇게도 큰(?) 결정을 내리면서 어떻게 계기가 없냐며 상대방이 당황스러워하면 '아 그런가?' 하며 다시 생각해본다. 흠. 하지만 역시 아주 분명하고 커다란 계기는 없었다. 아마 크고 작은 일들이 고리처럼 연결되어 마음의 향방이 결정되었던 게 아닐까.
대학이 향후 평생의 삶을 좌우하는 사회 시스템 때문에 모든 교육이 대학 입시로 귀결되는 교육체계가 마음에 안 들었다. 학교 내에서 빈번하게 벌어지는 폭력도 두려웠고, 성적이 매우 높거나 문제아로 낙인찍힌 아이들 외에 다수는 그림자처럼 취급되는 환경도 못마땅했다. 물론 내 아이는 공부를 잘할 수도 있다.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인정받으며 학교 생활을 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것 때문에 우월감을 갖는 것도 바람직한 모습은 아니지 않을까.
첫째 아이가 막 걸음마를 배우던 무렵으로 기억한다. 동네 도서관에서 우연히 [부모 인문학](리 보틴스, 유유출판) 책을 접했다. 부제는 '교양 있는 아이로 키우는 2500년 전통의 고전 공부법'이었다. 한창 인문학 바람이 불고 있던 터라 고전문학으로 공부하는 건가 생각했다. 제목이나 부제를 보고는 홈스쿨링 이야기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책은 세 자녀를 집에서 교육한 미국인 가정의 이야기였고 (당시 내 표현에 의하면) '뒤통수를 맞듯이 다른 배움에 눈 뜨게' 됐다.
학교에서 배우는 교과목은 아이들의 평균적인 발달 과정을 따라간다. 각자 타고난 기질과 성향에 따라 학습을 잘 따라가는 아이가 있고, 그렇지 못한 아이들도 많다. 한 학년을 뒤쳐지면 다음 학년에서 회복하기가 쉽지 않다. 저마다 배움의 속도는 다른데 학교가 이를 맞춰주기 쉽지 않은 반면 속도가 빠른 아이들은 큰 인정을 받는다. 그 과정을 고스란히 밟아 온 부모들은 학령기 전에 한글 학습을 하지 말라고 지침이 내려와도 일찍 글자 공부를 시킨다. 뒤쳐지면 안 되니까.
그런데 만약 경쟁하지 않을 수 있다면? 아이의 속도를 따라 충분히 배워갈 수 있다면? 빠르면 빠른대로, 늦으면 늦는 대로 자기만의 기질과 성향을 따라 배워갈 수 있다면 조급한 마음을 내려놓기가 훨씬 수월하지 않을까. 남들보다 더 빨리 배우는 것은 확실히 유혹적이다. 그렇지만 유혹을 뿌리치고 '더 충분히' 배워가는 것에 초점을 두기로 했다. 홈스쿨링을 하는 부모들이 믿는 한 가지 큰 전제가 있다.
아이들은 타고난 학습자다
오늘도 공부하기 싫어서 책상 앞에 앉아 몸을 버르적대는 아이를 생각하노라면 받아들일 수 없는 문장이다. 배움이 단지 교과서를 잘 기억하고 수학 문제를 잘 푸는 것이라면 그 생각이 맞다. 하지만 엄마를 엄마라고, 꽃을 꽃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건 아이가 자라면서 배워왔다는 증거다. 숟가락질을 하고 놀이터를 마음 껏 뛰어다니며 바위 위로 올라타는 것도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다. 아이들은 배우고 싶어한다. 세상의 아름다움과 이치, 또는 부조리함. 자기 자신과 타인에 대해 생각하고 알아가게 될 것이다. 그 끊임 없는 과정을 돕기 위해 기초를 놓아주는 일이 부모가 해야 할 일이며, 그 기초를 충분히 닦는 일이 아이들이 해야 할 공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