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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상우 Feb 19. 2023

사랑에 대하여

- 사랑, 헤아릴 수 없이 깊은 무엇 -


이 글은 사랑, 그중에서도 연인 간의 사랑을 의미하는 낭만적 사랑에 대하여 <사랑의 기술> (에리히 프롬, 1956)을 읽고서 느낀 점 중 가장 와닿았던 부분을 기록한 글이다.




1) 우리가 사랑을 하는 이유


사랑은 내게 참 커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20대 때 나의 감정은 연애를 할 땐 안정, 연애를 하고 있지 못할 땐 불안정했다. 불안정한 감정은 그 의미 그대로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 때문에 나는 불나방 마냥 사랑을 찾아 사방팔방 날아다녔다. 나는 왜 그렇게 불안해했고, 왜 그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사랑을 찾아다녔을까?


"분리는 정녕 모든 불안의 원천이다. 분리되어 있다는 것은 내가 인간적 힘을 사용할 능력을 상실한 채 단절되어 있다는 뜻이다."
                                                                                                                              - 사랑의 기술, 25쪽 -


사람은 불안을 느끼는데, 에리히 프롬은 모든 불안의 원천이 분리로 인해 발생한다고 말한다. 분리는 내가 어떤 집단 혹은 개인으로부터 어떠한 연결도 없이 단절되어 있음을 뜻한다. 이로 인해 분리는 절대 고독이며, 인간이 가지는 가장 강력한 무기인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는 힘(인간적 힘)을 사용할 기회가 영원히 단절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 인해 분리된 인간은 인간적 힘의 상실, 생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인간의 가장 절실한 욕구는 이러한 분리 상태를 극복해서 고독이라는 감옥을 떠나려는 욕구이다."

                                                                                                                              - 사랑의 기술, 26쪽 -


분리가 인간이 가지는 모든 불안의 원천이라면, 이 분리를 해소하기 위한 방법은 무엇일까. 사실 이것은 깊이 생각할 것 없이(조립은 해체의 역순) 타인 혹은 집단과 단절된 연결을 회복하는 것이 분리를 극복하는 유일한 해답이 될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연결을 회복하는 방법에는 무수히 많은 방법이 있고 그 방법들은 각각의 장점과 단점을 가지고 있다. (그 무수한 방법들의 장점과 단점을 알고 싶다면 <사랑의 기술>을 읽을 것을 적극 추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중에서 최선의 답을 찾아낼 것이고, 에리히 프롬은 1956년 그 해답을 찾아 <사랑의 기술>을 썼다. 에리히는 분리를 극복하는 완전한 해답으로 사랑, 다른 사람과의 융합인 사랑을 제시했다. 그가 말하는 사랑은 상호 간의 정신적, 물질적 합일을 의미하는 사랑으로 분리감을 느끼던 개인은 사랑을 통해 진정한 의미의 고독으로부터의 해방, 완전한 합일에 다다른다.


에리히 프롬이 말하는 불안과 그것을 해소하는 방법으로서의 사랑은 내가 20대 때 느꼈던 불안과 그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찾아다녔던 여러 사랑들과 일맥상통한다. 나는 그때 <사랑의 기술>을 읽지도, 알지도 못했지만 선험적으로 내가 느끼는 불안을 해소하는 방법을 알았는지도 모른다. 나는 홀로 불을 켜고 들어가는 원룸이 싫었고, 서울에 홀로 있다는 고독감이 싫었다. 그래서 사랑을 찾아다녔다. 사랑을 통해 상대와 합일을 이룸으로서 홀로 살아가는 고독감을 해소하고 싶었다. 나는 사랑을 그렇게 시작했다.



2) 우리가 사랑을 배우지 않는 이유



"사랑처럼 엄청난 희망과 기대 속에서 시작되었다가 반드시 실패로 끝나고 마는 활동이나 사업은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 사랑의 기술, 18쪽 -


사랑이 우리가 가진 불안을 해소하는 완전한 해답이라고 할 때, 우리는 왜 사랑을 하는 방법을 배우지 않을까? 사람을 치료하고 싶으면 의술을 배워야 하고, 건물을 짓고 싶으면 건축술을 배워야 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사랑을 그렇게 하고 싶어 하면서도 사랑을 배우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사랑의 문제를 '사랑하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받는'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그래서 사람들은 사랑을 배우는 것 대신 자신을 꾸미고, 경제적/사회적 지위를 높이기 위해 애쓴다.


둘째, 사랑의 문제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대상의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사랑이 실패로 끝난 것은 나와 상대가 맞지 않은 것이지 내가 가진 사랑의 방식이 잘못되었음을 생각하지 않는다.


셋째, 사랑을 하게 되는 최초의 경험과 사랑에 머물러 있는 상태를 혼동하기 때문이다.

- 사랑을 시작할 때 느끼는 그 강렬한 느낌만 사랑이라 생각하여 그것에만 관심을 가질 뿐 이후 사랑에 머물러 있는 상태는 사랑이라고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그 과정을 지속가능하게 하는 방법들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에리히 프롬이 말하는 사랑을 배우지 않는 이유 3가지에는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 한국인에게도 와닿는 아주 깊은 통찰이 담겨 있다. 허나 이는 우리가 인공지능 AI가 사람을 위협하지는 않을까 두려워하고 화성 이주를 위한 실제적 프로젝트를 실행하는 등 기술적 진보를 이루었음에도 사랑에 있어서는 그 어떤 진일보도 하고 있지 못함을 뜻한다. 왜 그럴까. 답은 간단하다. 우리가 사랑에 대해서 배우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에 대해서 배우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사랑을 배우지 않는다면 사랑은 주는 것이 아니라 받는 것이라 생각하여 사랑을 받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연애를 할 것이다. 상대와의 사랑이 성공적이지 못하면 그것은 나의 문제가 아니라 상대와 내가 맞지 않았기 때문이라 말할 것이다. 그 결과로 지속가능하지 못한 여러 사랑들을 겉돌면서 완벽한 합일에 이르지 못한 채 반복되는 불안과 고독감 속에서 힘겨워하는 삶을 살아갈 것이다.


나는 그렇게 살고 싶지도, 또 그런 사랑을 하고 싶지도 않다.  나는 사랑을 받고 싶기보다 주고 싶고, 또 사랑을 능동적으로 하고 싶다. 그렇기에 나는 사랑을 배우고 싶다. 내가 배운 사랑을 통해 상대와 지속가능한 그리고 상호 호혜적인 사랑을 나누고 싶다. 나는 사랑이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사랑을 주는 것인지에 대해선 아직 명확히 알지 못한다. 하지만 사랑이 그저 비논리적 감정 혹은 우연이 가져다주는 기적이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는다. 사랑은 기술이다. 사랑을 잘하고 싶다면, 사랑을 하는 그 기술을 배워야 한다. 그것이 내 삶을 이롭게 하고 내 삶의 불안을 해소하는 완전한 해답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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