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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호 Aug 31. 2022

오피스텔 투어

#독립 #처음 #인생

독립하기로 마음을 먹고 하루 걸러서 부동산에 전화했다. 오피스텔을 구한다고 하면 맨 먼저 입주 시기를 물었다. 열이면 열 다 똑같았다. 나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답했다. 가끔은 당장이라도 입주할 수 있다고 했다. 중개사들은 적극적인 구애에 당황할 법도 한데 침착하게 언제 방을 보러 올 수 있는지 되물었다. 나처럼 성질이 급한 손님용으로 쟁여 놓은 물건이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빠르면’은 피로한 말이다. 한국 현대사의 한 장면처럼 성장과 부실을 역설적으로 동시에 내포하고 있어서다. 빨리 입주할 수 있는 방은 그럴 만한 문제가 은밀하게 숨어 있었다. 그때는 문제가 의미하는 바를 읽어내는 눈이 없었을 뿐.


오피스텔 투어 첫날이었다. 관평동에서 오피스텔  곳을 잇달아 둘러보느라 어깨가  늘어졌는데, 반차까지  형편이어서 그대로 끝낼  없었다. 마침 둔산동에 신축 오피스텔에 빈방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계약만 맺으면 내일이라도 입주할  있다는 중개사의 말에 홀려 힘껏 자동차 액셀레이터를 밟았다. 둔산동 빌딩  한복판에서 우두커니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핸드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성보다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렸다.  걸음도  되는 거리에 중개사가  있었다. 얼굴이 각지고 몸이 두꺼운 사내였다.


사내가 소개한 방은 좁았다. 싱글 침대도 들여놓지 못할 것 같았다. 방이 좁네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사내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둔산동에 큰 방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하지만 층수가 높고 대전의 중심 시가지에 있어서 그런지 전망은 좋았다. 오래전부터 머릿속에 그린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나는 결심이라도 한 듯 주억거리고 사내에게 보증금과 월세를 물었다. 내심 원하는 걸 다 가질 수 없는 법이라고 스스로를 납득시키면서. 사내의 말은 이번에도 거침이 없었다. 500에 45요.


부동산 사무실에서 임대차 계약을 맺으려는 참이었다. 그때 관평동에서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계약 상대인 갑이 임대관리업체라는 이야기였다. 당연히 집주인이 개인일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적이 놀랐었다. 이번에도 집주인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신탁회사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위탁은 익숙해도 신탁은 낯설었다. 산 넘어 산이었다. 나는 미간을 찌푸린 채 보증금은 안전한 것이냐고 물었다. 결국에 중요한 건 목돈이니까. 까막눈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묻고 또 묻는 것뿐이었다.


사내는 안전하다는 말을 쏙 빼놓고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설사 신탁회사가 파산해 보증금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져도, 월세를 내지 않고 1년간 더 살면 된다고 했다. 1년간 월세가 540만 원이니까 보증금을 갈음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보통 오피스텔 임대차 계약은 1년간 맺는데, 나는 1년만 살 계획이었다. 사내의 말은 나를 설득하는데 실패했다.


나중에 인터넷으로 신탁사의 내막을 알고 나서 등골이 서늘했다. 보통 건물 소유자가 개인 투자자에게 오피스텔을 분양해 건설비를 회수한다. 이 일이 차질을 빚으면, 건물 소유자가 신탁회사에 건물을 담보 신탁해 은행에서 거액을 대출받는다. 문제는 오피스텔이 경매에 넘어가면 우선수익자가 은행이어서 세입자는 보증금을 거의 돌려받지 못하는 것이다.


대전으로 이사를 할 때도 그랬다. 회사 근처 부동산에 들어가 당장 입주할 수 있는 집이 있냐고 물었다. 마침 20평대 아파트 한 곳이 비어 있었다. 아다리가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두 눈으로 직접 봤다고 본 게 아니라는 사실을 살면서 깨달았다. 처음에는 준공한 지 30년이 된 아파트치고 깨끗하게 관리되었다는 인상을 받았다.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것이었다. 베란다 새시는 30년 전 그대로였다. 새시 여기저기에 틈이 있었는데 그 길로 여름에는 모기가, 겨울에는 찬바람이 무단침입했다. 언제나 그러하듯 깨달음은 연착했고, 무지의 대가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었다.


아저씨가 되어서도 까막눈 신세를 면치 못하는 게 한심해서 헛웃음을 지었다. 한편으로 하마터면 아무것도 모르고 계약할 뻔 했다는 생각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신탁된 오피스텔에 입주하는 건 높은 위험성을 안은 일이었다. 빨리 입주할 수 있다는 말은 오랫동안 외면을 받았다는 말이었다. 선택을 받지 못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물론 안전장치를 갖추고 계약을 하거나, 아무런 일이 벌어지지 않으면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전자는 안목이 필요하고 후자는 행운이 따라야 했다. 나는 현재의 방에서 미래의 위험을 예측할 수 있는 안목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에 빠르게 가지 않고 느리게 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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