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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호 Sep 08. 2022

여전히 관계는 피곤하지만

#인간관계 #관찰 #드로잉 #인생

아무런 눈길을 주지 않다가도 괜히 남이 잘하는  보면 따라 하고 싶어 진다. 오랜만에 그림 유튜버 이연  영상을 봤다. 그녀는 낮고 단단한 음성으로 무거운 이야기를 조곤조곤하면서도, 크게 힘을 들이지 않고 가볍게 드로잉  점을 완성했다. 마치 타임랩스 기법으로 촬영한 초고층 빌딩 건축 과정을 엿보는  같았다.


  전에 나는 뉴욕 갔다가 스케치북을  왔다. 한동안 퇴근하고 스테들러 펜으로 드로잉을 했다. 자기 주변에서 발견할  있는 물건들부터 그리라는 어느 예술가의 조언을 새겨듣고, 집안의 면도기와 카메라, 구두 따위를 따라 그리기 시작 것이다.


드로잉을 하면서 면도날에 베었을 때에도 눈여겨보지 않은 면도기 날을 코가 닿을 거리에서 관찰했다. 사중날이나 오중날일줄 알았는데 이중날이어서 미간에 세로 주름을 잡았다. 왠지 배신당한 기분이 들면서도 한편으로 그동안 내 물건에 너무 무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로잉은 사물에 말을 거는 일이었다. 물론 아무리 물어도 답이 없었기에 녀석을 뚫어져라 들여다보는 수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카메라 바디의 버튼 모양과 크기며, 렌즈에 인쇄된 폰트의 종류, 구두 갑피에 수놓은 무늬를 세심히 관찰했다.


답을 들으면 이내 도화지에 옮겼다. 사물이 말해주는  끝까지 들은 날에는 제법 그럴듯하게 그렸다. 인내심이 부족한 나머지 말을 끊은 날에는 도화지와 실제 사물을 번갈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행여 누가 볼세라 스케치북을 슬쩍 구석에 치워 버렸다.


드로잉을 하며 사물을 관찰하는 건 인간관계를 맺는 것과 비슷했다. 처음 만난 날에는 심문을 하듯 질문을 퍼붓는데, 피상적이고 말초적인 궁금증을 해결한 후에는 데면데면하게 굴지 않나. 인간은 비밀이 없어진 이에게는 더 이상 매력을 느끼지 못하게 설계된 모양이다.


문제는 꼭 상대방을 다 안다고 착각하는 순간 벌어진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남의 마음을 넘겨짚는 것이다. 정작 제 마음도 잘 몰라 방황하면서 말이다. 일이 벌어진 뒤에는 차라리 혼자 사는 편이 낫다고 한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간에 관계 맺는 일은 피곤하다.


여전히 눈팅만 하듯이 유튜버 이연 씨의 그림 그리는 영상만 보고 있다. 그럴 때마다 마음이 울렁거리는 배처럼 동하는데, 아직 서가 구석에 꽂힌 스케치북을 꺼내지 않았다. 아마 스테들러 펜을 찾으려면 온 집안을 뒤져야 할지도. 언제까지 피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결국 인간이 혼자일 수 없듯이 나는 펜을 들겠지. 오늘따라 책상의 노트북이 키보드가 빗이 내게 말을 거는 것 같다.


몇 해 전 종이 쪼가리에 그린 캐논 카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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