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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호 Sep 12. 2022

어쩌면 진짜 멋진 건 너인데

#산책 #아이 #성장

아파트 단지 둘레길을 걸었다.  걸음쯤 앞에서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말이 궁금한 나머지 걷는 속도를 높였다.


남자아이가 엄마가 밀어주는 세발자전거에 안락하게 앉은  옹알거리고 있었다. 나란히 걸을 때가 되어서야 겨우 말을 들을  있었는데, 나는 이내 얼굴을 종잇장처럼 일그러뜨릴 수밖에 없었다. 아이의 발음이 부정확한 데다 비음이 섞여 알아듣기 어려웠던 탓이다.


계속 세발자전거 옆에서 걸을  없었다. 아이 옆에는 몸이 두꺼운 아저씨가 있었다. 분명 아빠일 것이다. 그는 동물적 본능으로  새끼에 관심을 주는 나를 경계했다. 앞질러 가면서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엄마는 아이의 외계어를 이해했는지 연신 추임새를 넣었다. ", 그랬어." “정말?” 내심 엄마에게 답을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뭐라고 말하는 거예요?' 추임새는 엄마가 아이와 함께한 시간의 흔적일 .  사이 켜켜이 쌓인 세월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저만치 걷다가 신호등 앞에서 섰다. 뒤에서 익숙한 옹알이가 바람을 타고 날아왔다. 세발자전거 남아였다. 얼굴에 볼웃음을 짓고, 이번에는 한마디라도 알아듣겠다는 일념으로 귀를 쫑긋 세웠다.


문득 아이가 언어를 배우는 과정을 생각했다. 아이는 가나다라마바사 문자 체계를 외우고, 문장을 만드는 법칙을 익히고, 모든 준비를 마친  완전한 문장을  밖으로 내지 않는다. '완전' 아이에게  나라 이야기다. 아예 아이의 사전에는 없는 단어일지도 모르겠다. 그저 아이는 불완전한 줄도 모르고 불완전한 말을 내뱉는다. 고치고 다듬는 일은 뒷일이다. 그러면서 배우고 성장한다.


대학원에서 린스타트업에 대해 배운 적이 있다. 린스타트업은 빠르게 제품을 만들어 시장에 선보이고, 재빨리 소비자들의 반응을 반영해 제품을 개선해 다시 시장에 내놓는 걸 반복한다. 대개 스타트업은 내일 당장 문을 닫아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에 놓여 있다. 이러한 불확실한 상황에서 제품을 효과적으로 개발하기 위해 고안한 게 린스타트업인 셈. 과거 일본산 가전이 시장을 지배했던 소니 시대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아이가 언어를 배우는 일도, 어른이 문제를 해결하며 성장하는 일도 린스타트업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신호등이 초록불로 바뀌고 걸음을 떼는데, 아이의 말이 음절 단위로 한 자 한 자 날아와 귀에 박혔다. 마치 미국 패스트푸드점에서 “포 히어, 오어 투 고?”를 알아먹은 때처럼 내적으로 환호 작약했다. 아이의 말을 온전한 문장으로 옮기면 이랬다.


"엄마 빨리 가."

"저 형아가 먼저 가네."

"우와, 멋지다."


'멋지다'는 말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아서 그런지 의아하면서 주책맞게도 예기치 못한 순간 눈가가 시큰해졌다. 칭찬을 들은 일이 까마득했다. 아이 눈에는 보통 걸음으로 걷는 일도 멋진 일인 모양이다. 어른들이 사소하게 여기는 일에도 감탄하는 아이의 능력이 새삼 탐났다. 어쩌면 진짜 멋진 건 너인데. 눈가에 이슬처럼 맺힌 눈물을 손등으로 훔쳤다. 그새 세발자전거는 저만치 멀리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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