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아, 보람 따위 됐으니 야근수당이나 주세요>를 읽고 쓰다
1. '일 권하는 사회'에 대한 도발
얼마 전 트위터에서 수천 RT가 되어 돌아다니는 사진을 하나 본 적이 있다. '아, 보람 따위 됐으니 야근수당이나' 달라며 능청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는 양복 차림의 남자, 그 앞에는 '보람'이라 쓰인 꾸러미를 내밀고 있는 머리가 벗어진 남자. 화룡점정으로 양복 입은 남자 옆에는 '어디서 개수작을'이라는 말까지 쓰여 있다.
처음엔 그냥 사회풍자 일러스트 같은 건 줄 알았는데, 최근 출간된 책의 표지였다. 홍보효과 하나는 확실히 보장해줄 만한 도발적인 제목이다. 출간되자마자 표지 사진의 RT 수가 수천이 넘어가고 인터넷 상에서 화제가 된 걸 보면, '보람 따위 됐으니 야근수당이나' 달라는 말이 확실히 작가 혼자만의 생각은 아닌 것 같다. 모두가 생각은 하지만 아무도 쉽게 하지 못하는 말. 열정 페이나 과로사 같은 단어들이 뉴스에 심심찮게 등장하는 '일 권하는 사회'에 대한 도발이다.
2. 한 달에 50만 원, 막내 조연출의 나날들
모 가수의 콘서트에서 조연출로 6개월가량 일을 했었다. 페이는 전부 300만 원, 그러니 한 달에 50만 원이었다. 집 앞 카페에서 최저시급을 받고 하루 4시간, 주 5일 아르바이트를 하던 때와 비슷한 수준이다. 그럼 일하는 시간도 비슷했냐 하면, 전혀요.
일하는 시간은 들쭉날쭉 이었다. 별일이 없으면 오후 2시에 회의를 시작했고, 끝나는 시간은 저녁일 때도 새벽일 때도 있었다. 초반엔 회의나 미팅을 하는 시간만 따지면 그럭저럭 50만 원만큼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공연 날짜가 다가올수록 50만 원을 시급으로 환산해보는 일도 무의미해졌다. 주말 반납은 당연했고, 할증도 풀린 시간에 택시를 타고 달리는 강변북로는 익숙한 풍경이 되었다. 어쩌다 저녁에 집에 가는 날이 생기면 모두들 어색해하며 사무실을 나섰다.
“월급은 그다지 많지 않고 휴가도 웬만해서는 못 쓸 정도로 매일 바빠 죽겠어. 그래도 일 자체는 굉장히 보람이 있어서 만족스러워.”
눈을 반짝이며 이런 소리를 하는 사람을 본 적 없는가?
이런 자세로 일하는 사람을 보고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상당수 있을 듯한데, 우리는 좀더 냉정하게 따져봐야 한다. (78-79p)
이렇게 일하던 조연출 시절의 내가 바로 '눈을 반짝이며 이런 소리를 하는 사람'이었다. 학교와 일을 병행하느라 밥 먹을 틈도 없이 커피만 하루 네 잔씩 마셔대고, 새벽 퇴근은 일상이고, 주말 개념 없고 취미생활은 사치였던 날들. 그 시절의 나는 '열심히 사는 나'의 모습에 취해있었다. 말도 안 되는 수준의 수당을 받고 몸은 축날 대로 축났지만, 해보고 싶었던 일을 하고 있으니까 좋은 거라고. 공연이 끝나고 '열심히 사는 나'라는 환상에서 빠져나오고 나니, 다른 생각들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 6개월은 정말 좋기만 한 나날들이었을까.
3. 노예적 사고방식의 지배
문제는 일하는 시간이 너무 많다는 것보다는 (사실 이것도 문제긴 하지만), 그렇게 일해서 얻는 보람이나 경험 같은 무형의 보상이 적절한 수당이라는 물질적 보상과 양립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없었다는 것이다. 적어도 내가 보고 들은 범위 내에서는, 공연 업계는 철야 작업도, 적은 수당도, 불규칙한 근무 시간도 전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일의 특성상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지만.
음식점 아르바이트 종업원의 시급은 수도권의 경우 대략 만 원 이하일 텐데, 그들은 고작 그 정도 돈을 받으면서 높은 수준의 접객 서비스를 제공할 것을 강요받는다.
“그렇게 뛰어난 서비스를 요구할 거면 월급을 올려주란 말이야”라는 주장은 당연히 통하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는 ‘아르바이트가 됐든 뭐가 됐든 돈을 받는 이상 프로이므로 반드시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이해할 수 없는 사고방식이 자리한다. 받는 금액에 따라 그에 맞는 만큼만 일하면 된다는 ‘가격 상응’의 사고방식은 전혀 찾을 수 없다. (44p)
심지어 나는 '내가 돈을 받아도 되나'같은 생각까지 하고 있었는데, 다른 조연출 선배들에 비해 내가 팀에 기여하는 부분이 터무니없이 적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나는 분명 수당에 비해 많은 일을 하고 있었다. 단지 '가격 상응'의 사고방식으로 생각할 수 없는 환경이었을 뿐이다. 나보다 훨씬 뛰어난 선배들이, 나보다 많은 일을 하면서, 나보다 조금 많은 수당을 받고 있었다. 그 상황에서 내가 '받는 만큼만 일해야지'같은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다시 돌아가더라도 그럴 수 없을 것 같다.
4. 당연하지 않아야 하는 당연함
그러니 문제는 개개인에게 있는 게 아니라, 불합리한 수준의 보상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업계의 관행이다. '당연하지 않아야 하는 당연함'이다. 정도의 차이일 뿐이지, 공연 업계뿐만 아니라 많은 직업군들에서 과도한 업무와 그에 비해 적은 수당은 고질적인 문제일 것이다.
우리가 회사를 위해 일하는 대가로 약속된 것은 기본적으로 ‘월급’ 뿐이다.
일을 일답게 해주는 것은 결국 ‘회사에 제공하는 노동’과 그 대가로 받는 ‘월급’이라는 두 가지 요소다.
보람은 어디까지나 이 두 요소를 충족한 후 사람에 따라 얻을 수 있는 ‘덤’일 뿐이다.
고작 덤에 불과한 보람을 위해 노동의 정당한 대가인 ‘야근수당’을 받지 못하거나 ‘보람 있는 일’이라는 이유로 일의 강도와 수준에 전혀 합당하지 않은, 쥐꼬리만한 월급을 받는 것은 좀 이상하지 않은가?
이 책의 제목이자 앞에도 적은 “아, ‘보람’ 따위 됐으니 야근수당이나 주세요”는 지극히 당연한 소리를 지극히 당연하게 한 것에 불과하다.
이런 당연한 소리를 당연하게 말할 수 없는 회사, 그런 회사가 파다한 사회를 과연 건강하다고 할 수 있을까. (7-8p)
당연한 소리는 당연하게 말할 수 없고, 당연하지 않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사회다. 보람 따위 필요 없으니 돈이나 달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돈은 필요 없으니 보람을 느끼고 싶은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원하는 가치를 추구할 수 있는 기본적인 조건이 갖춰져야 한다는 것이다. 매일 정시 퇴근, 정확한 야근수당, 눈치 보지 않고 휴가를 쓸 수 있는 분위기 같은 것들. 즉, "아, 보람 따위 됐으니 야근수당이나 주세요"라고 당연하게 말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