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미스 슬로운>을 보고 쓰다
'미스 슬로운'(제시카 차스테인)은 워싱턴 DC 최고의 로비 회사인 콜-크래프트 워터맨 소속의 잘 나가는 로비스트다. 풀네임은 매들린 엘리자베스 슬로운(이하 리즈 슬로운). 리즈 슬로운은 잠들지 않기 위해 약을 먹어가며 하루 16시간을 일하는 워커홀릭이다. 하지만 자신이 지지하지 않는 법안을 위한 로비 활동은 거부하는 것이 그녀의 신념. 회사가 총기 규제 법안을 저지하려는 정치인의 제안을 받아들이자, 리즈 슬로운은 이에 반대하며 자신을 따르는 몇몇 팀원과 함께 해당 법안을 지지하는 작은 로비 회사로 옮겨간다. 그리고 여기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치열한 로비 전쟁을 벌이기 시작한다.
<미스 슬로운>의 플롯 자체에는 크게 특별한 점이 없다. 능력 있고 냉철한 직업인이 앞뒤 보지 않고 마이웨이를 달리다가 막판에 정의 구현을 위한 큰 한 방을 터뜨린다는 이야기, 그동안 지겹도록 봐온 것이지 않은가. 그럼에도 이 영화가 특별한 이유는, 지금껏 수많은 남자 배우들만이 맡았던 캐릭터를 여성으로 그려냈다는 점이다. 성공과 승리에 대한 욕망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고 그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능력까지 갖춘 리즈 슬로운 캐릭터는, 여성 관객들에게 대리만족을 넘어 어떤 카타르시스를 안긴다. <히든 피겨스>와 상당히 결이 다른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히든 피겨스>와 <미스 슬로운>에 동시에 열광하는 여성 관객들이 많은 이유는 그래서다. 그간 영화 속에서 남자 배우들에게만 주어졌던 자리에, 여자 배우들이 올라앉아 영화를 끌고 간다는 것.
<미스 슬로운>이 기존의 유사한 플롯들에서 주요 캐릭터들의 성별을 전복시킨 이야기라면, 이는 곧 기존 서사들이 그리는 여성 캐릭터의 전형성에서 벗어난 이야기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미스 슬로운>이 가진 또 하나의 미덕이 여기서 기인한다. 리즈 슬로운은 젊고 아름다운 여성이지만 영화는 단 한 장면도 그녀의 몸을 눈요깃거리로 소비하지 않으며, 그녀가 일에 몰두하는 것은 과거사나 개인적 상처 같은 감정적 요인이 아닌 오로지 자신의 신념과 성공에 대한 욕망에 의해서다. 여성 캐릭터라면 으레 몸을 부각하는 장면을 넣고, 여성들의 행동엔 감정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라 여기는 기존 서사들과의 차이점이다.
사실 리즈 슬로운이라는 인물 자체에 동의하기는 어렵다. 그녀는 어쨌건 오로지 승리만을 바라보는 사람이고, 이를 위해 동료의 치부를 이용하는 등 정의롭지 못한 행동도 마다하지 않는다. 총기 규제 법안을 저지하려는 거물 정치인과 대형 로비 회사, 그리고 이에 맞서는 슬로운의 대결 구도는 얼핏 그녀를 정의의 편으로 착각하게 만들지만, 그녀는 그리 정의로운 인물이 아니다. 이 대결은 사실상 개새끼와 개새끼의 싸움이고, 막판에 약간이나마 속죄의 마음을 담아 정의 구현을 한다고 해서 개새끼가 개새끼가 아니게 되지는 않는다. 슬로운이 '지진'을 일으키는 청문회 장면에서, 그녀의 부정의를 지켜봐 온 슈미트(마크 스트롱)와 그녀에 의해 비밀을 폭로당한 에스미(구구 바샤-로)가 끝까지 웃지 못했던 이유다.
그럼에도 리즈 슬로운이 거부할 수 없이 매력적인 악인이라는 데에 동의할 수밖에 없는 건, 8할이 제시카 차스테인의 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살벌한 로비스트의 세계, '쥐 같은' 정치인들에 대한 경멸, 승리에 대한 강렬한 욕망까지 모든 것을 설명하고 납득시키는 그녀의 연기는 가히 압도적이다. 사실, 로비스트들의 갑옷이라는 명품 정장에 완벽한 풀메이크업을 하고 화려한 언변으로 상대를 찍어 누르는 차스테인이라면, 이 영화를 봐야 할 이유로 충분하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