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현진이와 회사 근처에서 점심을 먹고 커피를 마셨다. 대학교 1학년 때부터 붙어 지내던 현진이와 나는, 이제는 회사도 집도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다. 지칠 만도 한데, 나는 지치지 않고 현진이에게 끊임없이 놀아달라고 하고, 현진이는 못 이기는 척 나랑 놀아준다. 어제는 늘 그렇듯 현진이가 점심메뉴를 골랐고, 늘 그렇듯 내가 달달한 디저트를 골랐다. 인테리어가 근사한 스타벅스에서 창밖을 보고 있는데, 현진이가 그랬다.
"옛날에도 이렇게 학교 앞 스타벅스에서 너랑 커피를 마셨는데, 17년이 지났는데도 스타벅스에서 이렇게 너랑 커피를 마시고 있네."
그래서, 내가 대답했다.
"그러게, 그때보다 지금 훨씬 노블하네."
나는 빛나는 총명함이나 창의성을 갖고 있지도, 엄청난 미모를 가지고 있지도 않지만, 버티는 것을 곧잘 하는 편이라 생각한다. 나는 단기간에 무엇을 잘하려는 생각조차 안 하기 때문에, 시작하는 게 어렵지 않고 포기할 필요도 없다. 천천히 꾸준히 하면 언젠가 잘하게 될 거라는 믿음이 있다. 현진이가 회사를 취직할 수 있을지 걱정이라며 매일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을 때도, 나는 내 친구가 17년 후에 잘 나가는 회사원이 될 것이라고 미리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저 친구도 시작한 일들을 쉽게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포기하고 그만두지 않으면, 언젠가는 빛을 보기 마련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가 30년 후에는 더 잘 살고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지금보다 훨씬 근사하게.
한 때는 몇 년을 고시공부를 해도 시험에 합격하지 못한 사람들이 시간낭비하고 있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예전엔 '1-2년 하고 못 붙으면 빨리 그만두는 게 맞는 게 아닌가?'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다. 시험이라는 게 한정된 범위에서 나오는 문제이니까, 10년이 넘어도 꾸준히 준비하다 보면 언젠가는 합격하게 되어 있다. 열심히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에게 함부로 '장수생'이니, '왜 아직도 시험을 못 붙었니?' 이렇게 남의 인생을 재단하고 평가해서는 안된다. 게다가 도전을 해서 성취해낸다는 경험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내가 생각하는 공부의 목적은 높은 점수나 좋은 성적이 아니다. 무엇인가를 연구하고 몰입하는 경험과 자신감이 인생을 살아갈 동력이 되는 것이다. 100년까지 살지도 모르는 긴긴 인생에, 고작 십몇 년 준비하는 시간이 뭐 얼마나 아까우랴. 십몇 년 준비해서 겸손해지기도 하면서, 무엇인가를 성취해냈다는 자신감까지 생긴다면 인생에서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닌 것 같다.
얼마 전 윤여정 님이 아카데미에서 멋들어지고 우아하게 말할 때, 나는 그녀의 유창한 영어실력이나 유머 실력에 감탄했다기보다는 그 긴 시간 버텨낸 것에 박수를 보냈다. 결단을 하고 이혼을 결정한 시간, 아이 둘을 데리고 한국으로 돌아온 시간, 멈추지 않고 계속 일을 해내는 시간. 다 포기하고 도망하고 싶을 때도 있었을 텐데, 도망가지 않고 천천히 버텨낸 것이다. 그 긴 시간을.
요새는 감정이입이 되어서 그런지 꽁냥꽁냥 한 연애드라마보다는 인생의 긴 터널을 지나온 어르신들의 이야기에 그렇게 감동을 받는다. 어제부터 동아와 '나빌레라'라는 드라마를 같이 보기 시작했는데, 어젯밤부터 얼마나 울어댔는지 모른다. 한 할아버지가 70세가 되고서부터 어렸을 때 꿈이던 발레를 시작한다는 내용인데, 드라마에는 최백호의 바다 끝이라는 노래가 나온다. 거기에 이런 가사가 나온다.
' 아름다웠던 나의 모든 노을빛 추억들이 저 바다에 잠겨 어두워지면 난 우리를 몰라.'
지나고 보면 이 모든 순간이 다 추억이다.
지금 내가 지나고 있는 이 긴 긴 터널도 감내하고 견뎌내면 아름다운 추억이겠지.
비록 뜨겁지는 않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