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2016.07.10
다 젖은 바지. 새빨간 광대. 유난히 더웠던 지난 토요일 아침, 뛰고 난 후 내 모습은 이랬다. 평소 같았으면 곧장 찬물 샤워를 했겠지만, 이날은 인스타에 사진 한 장을 올렸다. 1000km 돌파! 나이키 러닝 앱이 알려줬다.
누적 거리 1000km
총 러닝 횟수 122회
평균 속도 5'41"
2013년 8월 24일 4.56km 동네 한 바퀴부터, 2016년 7월 9일 서강대교~홍제천 왕복 10km까지 만 3년의 기록이었다. 나이키 앱은 그날 뛴 거리, 속도, 기온까지 알려준다. 사실 뭐 대단한, 꺼리도 안 되지만 뭔가를 100번 넘게 한 적이 있었나 싶어 몇 자 적기로 함. ㅎㅎㅎ
첫 풀코스에 도전한 건 3년 전 10월이었다. 시작은 이랬다. 에세이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읽고, 친구와 마라톤을 등록했다. 무작정이라는 말이 딱 맞다. 결과는 어찌 어찌 해서 5시간 20분대 완주. 그날 이후 하루키의 저 책을, 영문판을 포함해 다섯 번 넘게 읽었다. 거창하지만 나의 달리기 매뉴얼인 셈이다. 언제 봐도, 또 막 뛰고 싶어지는 그런 책이다.
여행을 갈 때면 러닝화 한 켤레, 짧은 상하의 두 벌, 도톰한 러닝 양말부터 챙긴다. 국내외 어디든 1박 이상 하는 여행이라면 매번 그랬다. 2011년 상해 와이탄에서 길을 잃은 후론, 낯선 곳에선 지폐 몇 장을 챙긴다.
발톱이 자랄 틈을 두지 않는다. 길이가 몇 mm이냐에 따라서 양말에 빨간 얼룩이 지기도 한다.
지난 몇 년간 그 이유가 바뀌었다. 열두 달 언제 뛰든 러너스 하이는 있다. 단 30분 이상 뛰어야 그렇다. 헐떡임이 좋은 거다. 나는 하프가 딱 좋은 것 같다. 풀코스는 매번 남은 10km, '내가 왜' '내가 왜'만 외치다 들어왔던 것 같다.
한 두 해가 지나면서 감지한 건, 통증에 무뎌진다. 빳빳하게 굳어오는 종아리 근육과 팽팽하게 당겨오는 복근은 '요새 덜 뛰었구나' 하는 신호다. 신기한 게 10여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무뎌진다. 내 몸의 '통증 역치'가 높아지는 건 즐겁다.
또 하나, 뻔하지 않아서 좋다. 여행지 도심에서 홀로 민소매에 숏팬츠를 입고 뛰는 모습은 기괴하다. 2014년 9월 방콕에 나흘간 머물렀다. 어김없이 아침마다 코스를 바꿔가며 뛰었다. 3일차엔 미 대사관을 지나는 경로였는데, 출근길 많은 직장인들이 노상에서 아침을 해결하고 있었다. 태국어를 전공한 친구가 알려주길, 방콕 사람들은 거의 아침을 사 먹는다. 쇼핑몰과 호텔이 빽빽한 수쿰빗만 뛰었다면 몰랐을 거다. 로컬 라이프를 아는 데 조깅 만한 게 없다.
1. 센트럴파크. 작년 가을 뉴욕에 머무는 동안 몇 날 아침을 여기서 보냈다. 11월 초 아침 내가 본 러너만 수백명이었다. 다들 러닝복을 갖춰 입고 엘리트 러너처럼 뛴다. 작은 올림픽을 보는 기분이다. 숙소가 있던 헬스키친에서 공원 입구까지 5분가량 가볍게 뛰고 공원 내 호수까지 약 7km를 달렸다.
2. 속초 외옹치항. 해변은 내가 가장 선호하는 코스다. 거제 통영 강릉 삼척 등 많은 바닷가를 뛰었지만, 속초가 유독 기억에 남는다. 올해 3월 말 속초 대포~외옹치항을 뛰었다. 왕복 5km남짓 그리 길지 않은 코스지만, 동해 바다의 압축판을 볼 수 있다. 파시, 방파제, 해변, 일출, 해안도로가 차례로 보인다.
3. 시애틀. 즐겨보는 잡지 러너스월드엔 'Rave run'이라는 코너가 있다. (입이 떡 벌어지게) 경치가 좋은 러닝 코스를 소개한다. 언젠가 시애틀의 도심을 넋 놓고 본 적이 있다. 마천루, 해안, 봉우리가 어우러진 서울 한강변을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