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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지연 Mar 11. 2016

자몽 -2-

내가 한 때 자몽이라고 불렀었어




주말을 앞둔 날의 테니스는 평소보다 강도가 높았다. 아직 더 치고 싶어하는 그녀에게 나는 어깨가 빠질 것 같다고 투덜댔다. 그녀와 나는 퇴근 후의 시간을 주로 운동으로 채웠다. 처음엔 탁구를 했었는데 이내 그만두었다. 그녀는 비싼 회비를 냈는데 매번 빈 탁구대가 없어 기다려야 하는 게 싫다고 했고, 나는 오랫동안 시설을 이용해온 동네 아주머니와 아저씨들의 쓸데없는 텃세를 험담했다. 다음으로 선택한 것은 수영이었는데, 하필 겨울에 시작했던 터라 물 속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이 너무 추웠다. 그녀는 강사를 흘끔거리며 조금 더 다녀보자고 했지만 나는 추위를 이길 정도는 아니라고 나무랐다. 그녀도 나도 추위를 많이 타는 체질이었기 때문에 특별한 갈등 없이 그만두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겨울을 가장 좋아했다. 긴 고민 끝에 찾은 건 테니스였다. 집 근처에 실내테니스장이 하나 있었는데 제법 넓은데다가 시설도 깨끗했다. 먼저 사용했다고 자리를 전세 내는 이기적인 사람들도 없었다. 그녀는 운동신경이 좋은 편이어서 처음에는 거의 내가 지고 말았다. 배드민턴이라면 어렸을 때 아빠와 자주 해본 경험이 있어 자신이 있었지만 테니스볼은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그녀는 서로 균형적으로 할 수 있는 종목을 찾아보자고 했지만 어쩌다보니 우리는 반년이 넘도록 테니스를 치게 되었다. 퇴근 후에는 집이 아닌 테니스장에서 만났고, 마친 후에는 가끔 맥주를 마시거나 집에서 영화를 다운받아 보았다. 

이번엔 그녀가 추천하는 차례였다. 그녀는 개봉했을 때 보지 못해 아쉬웠다며 처음 보는 제목의 영화를 플레이했다. 영화는 스페인을 배경으로 한 투우사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었다. 상투적이고 진부한 부분이 없지 않았지만 진솔한 시선으로 투우사를 그려내고 있었다. 다만 별점 네 개짜리 수준치고 크게 마음에 와 닿는 감동은 없었다. 

이래서 명작이라는 영화는 조심해야해.

있잖아, 넌 너무 까다로워.

소를 학대하는 장면이 나왔다고.

나는 조목조목 영화의 장면을 예로 들어가며 혹평을 쏟아냈다. 나는 인간의 유흥 때문에 동물이 희생되는 것은 어떤 것이든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중학교 시절 우리에 갇힌 사막여우가 기계적으로 제자리를 도는 모습을 본 이후로 다시는 동물원에 가지 않겠다고 결심했었다. 그녀는 투우사와 소의 삶이 어떻게 달랐는지에 집중했다.  

그게 뭐더라. 전열을 가다듬고 다시 싸울 수 있는 황소만 안다는 그 공간. 

퀘렌시아?

그래. 그게 투우사에게도 필요했던 거 아닐까. 남들은 모르는, 자신에게만 편안한 곳.

그녀의 말에 나는 투우사의 생애를 되새겨 보았지만 잘 공감이 되지 않았다. 

내가 동물애호가라 어쩔 수 없어.

애호가?

그녀가 갑자기 테이블을 치며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쏟아질 뻔한 맥주를 가까스로 붙잡고는 그녀를 흘겨보았다. 

네가 집에 막 합류했을 때 내가 레몬에이드 데려온 적 있었잖아. 세상에 이렇게 예쁘게 생긴 토끼들이 있냐고 했으면서 물린 다음부터는 너 엄청 싫어했잖아. 내 눈치를 보면서 꿀밤을 쥐어박는 그 표정이 얼마나 우습던지. 알레르기만 아니었어도 그 귀여운 녀석들을 계속 키웠을 텐데. 문 녀석이 아마 레몬이었지? 이름도 네가 지어줬으면서.  

상큼한 애였다고, 레몬처럼. 

에이, 상큼한 건 자몽이지.

나는 어째서 자몽이 상큼하냐고 물으려다 그만두었다. 

엄마는 자몽을 좋아했다. 향수였는지 바디로션같은 것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품에 안겨있으면 자몽 냄새가 났다. 가끔씩 자몽주스를 만들어주기도 했지만 나는 자몽 특유의 쓴맛을 싫어해 마시지 않았다. M을 처음 만났던 날, 나는 희미하게 자몽 냄새를 맡았다. 

M 말이야. 내가 한 때 자몽이라고 불렀었어. 

아, 그래?

근데 실제로 부른 적은 없어. 

문득, 그 향기가 착각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 M은 입원 중이었다.

십일 년 전, M은 큰 교통사고를 당했다. 정확히는 M의 가족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아빠가 어두운 표정으로 나를 붙잡았다. 제주도에 가야겠다, 엄마 보러. 나는 엄마를 보러 간다는 말이 신기하면서도 이상하게 느껴졌다. 마치 앞에 나가보고 싶은데 막상 누군가가 떠밀어주면 나가기 싫어지는 기분처럼,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살짝 뒷걸음질 쳤다. 아빠 뒤를 따라 들어간 장례식장에서 엄마의 영정사진을 보았을 때, 나는 또다시 뒷걸음질 쳤다. 슬프기보다는 먹먹하고 낯설었다. 엄마가 저렇게 생겼었나. 열 살 때에 마지막으로 보았던 엄마의 모습과 비교해 보았지만 끝내 낯선 느낌은 지울 수 없었다. 그 옆에 놓인 남자의 사진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아마도 아빠가 말했던 엄마의 재혼한 남편일 것이었다. 어른들과 대화를 나누던 아빠는 나를 이끌고 장례식장과 이어져 있는 병원으로 향했다. 여러 명이 사용하는 병실의 가장 바깥쪽에 한 아이가 한쪽 팔에 붕대를 감은 채 누워있었다. 가녀린 체구에 하얀 피부를 가진 아이였다. 아빠가 친절하게 말을 걸었지만 아이는 고개를 돌린 채 우리 쪽을 보지 않았다. 아빠는 주춤거리고 있는 내 등을 떠밀었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아이가 조심스레 나를 바라보았다. 정면으로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나는 한눈에 그 아이가 나의 이부동생임을 알았다. 아이는 놀랍도록 영정사진 속 엄마를 닮아있었다. 

엄마는 내가 아닌 M을 선택했다. 부모님은 내가 일곱 살 때 이혼을 했고, 나는 무슨 이유로 두 분이 헤어졌는지 알지 못했다. 엄마는 곧 데리러 오겠다며 잠깐 아빠 집에 머물러 있으라고 했다. 내가 열 살이 되었을 때 잠깐 보러 왔지만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 날 엄마와 나는 함께 외식을 했다. 내가 아빠와 고모와 할머니가 함께 사는 집에 머문 지 오 년이 넘도록 엄마는 다시 오지 않았다. 어쩌면 아빠와는 연락을 했었는지도 몰랐다.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아빠는 내게 엄마가 다른 남자와 재혼을 했으며 그 사이에 초등학생 딸이 있다는 소식을 알려주었다. 아빠가 아는 것은 그것뿐이라고 덧붙였다. 나도 더는 묻지 않았다. 사실 그 즈음에 나는 엄마에 대해 거의 잊었다. 내겐 언제나 따뜻한 아빠와 엄마처럼 나를 사랑해주는 할머니와 고모가 있었다.  

Drawing by SEY CHRISTINE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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