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그 가식은 어디서 배운걸까?
학교에서 배웠던 4자성어가 있었다.
'역지사지(易地思之)'
사전적 의미로, 남과 처지를 바꾸어 생각해본다는 의미이다.
주어는 다른 누군가가 아닌, 나 자신이다.
점심시간.
햄버거 가게에서 주문을 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어떤 젊은이의 차례가 왔다.
단품 버거에 300원을 추가하면 세트메뉴. 그 세트메뉴에 600원을 추가하면 라지세트로 준다.
젊은이가 말한다. "ㅇㅇㅇ 버거 주세요." (물론 세트를 의도했지만, 세트임을 명시하지 않았다.)
점원의 멘트. "세트에 600원 추가하면 라지세트로 드려요. 라지로 드릴까요?"
다시 젊은이가 말한다. "300원을 추가하면 세트 아니던가요?"
점원이 다시 말한다. "네. 그리고 600원을 추가하시면 감자와 음료가 업그레이드됩니다."
뭐, 흔한 이야기.
젊은이의 언성이 격양되어 말한다. "제가 이해가 안되서 그러는데요...."
그래. 상황에 대한 평가는 차치하고,
저게 화가 나는 이유였다.. '내가 이해가 안되서...'
중간고사 기간이 끝나고, 뒤통수를 맞는 듯한 강의 피드백을 들었다.
연구실 지도교수의 질문에 답을 못한 학생에게, 지도교수가 그랬단다.
"수업시간에 무엇을 배웠느냐"고.
학생은 '강의의 교수법이 남달라서' 배우지를 못했다고 그랬다는 후문.
그 과목의 중간고사 채점을 하면서, 쓴웃음이 나왔다.
시험 성적이 좋지 않게 나온 것은, 이해를 못해서이고,
이해를 하지 못한 것은, 공부를 하지 않아서이다.
적어도, 최소한의 노력(공부)를 했으면 풀 수 있는 문제들이 꽤 있었다.
본인들의 귀책은 다 개인적인 사유가 있어서 받아들여지고,
결국 남아있는 이유로, 본인 이외의 핑계거리만이 남는다.
이것이 그들의 역지사지(易地思之).
남의 것에서 이유를 찾는다.
그들을 이해한다. 나 역시 그랬던 적이 있었으니까.
그게 이 험한 세상에서, 나를 다치지 않게 하는 유일한 방법일 거라고 생각했었으니까.
그들의 반응 기저에 깔린 일종의 '방어 본능'이,
이 험한 세상에서 나를 지켜줄 수 있을 줄 알았다.
'공감코스프레(共感Cospre)'
공감의 사전적 의미는 이렇다.
"남의 감정, 의견, 주장 따위에 대하여 자기도 그렇다고 느낌. 또는 그렇게 느끼는 기분."
대상과 상황에 대한 이해를 배제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성 갑(甲)으로 보여지기 위해,
남에게 배려심으로 평가받기 위해,
혹은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
공감을 연기한다.
공감의 전제는, '이해'와 '동의'이지만, '공감코스프레'에는 '이해'가 빠져있다.
굳이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동의가 아닌 인정을 해주는 배려를 베푸는 전지적 시점.
스스로의 가치판단은 뒤로 하고,
'객관적 시각'이라는 자의적 기준에 비추어
측은지심(惻隱之心)을 발휘한다.
이순간, 굳이 '나'라는 사람이 존재하진 않는다.
남과 다르면, 이상하거나 틀린 것으로 간주되는 세상에서 나고 자라 배웠기 때문에,
남에 대한 평가의 순간에, 나는 곧 존재하지 않는 '평균적 인간'의 입장(만)을 취하면 되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친절한 배려가 불편하다면, 이유는 여기에 있다.
상황에 대한 일말의 이해도 없이 그저 다 안다는 듯 배려해주는 듯한 온화한 미소 뒤에는,
의문의 1패를 당한 누군가에 대한,
패하지 않았기 때문에 승자가 된 안도감에 근거하는,
전지적 자신감에 도취한 불편한 진심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결과보다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하면서도,
실제로 모든 것이 결과로만 평가되는 세상이다.
익명화된 세상에서, 누군가의 가식적인 배려에 불편해하면서도,
동시에 나 스스로 전지적 객관화로 누군가를 평가하는 일에 대해서는,
무감각하다.
다르면 안되기 때문에, 굳이 다른 것을 이해하는 과정을 배우지 않았고,
그렇기 때문에 나 자신은,
내가 아닌 남이 되어버리는 순간,
절대로 다르지 않기에 틀릴 리가 없는 세상의 익명화된 조각이 되어,
이해의 과정은 생략된 채로,
절대선을 이야기하고, 그것을 진리로 받아들인다.
몰이해를 바탕으로 한 다른 이에 대한 배려는,
스스로에 대한 지나친 관대함과 다름이 없다.
이해를 전제로 동의하지 못하는 진심이,
차라리 아쉽다.
@ 나 역시, 지금 이 순간에 공감을 연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