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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서희 Sep 01. 2022

빛바랜 어느 라디오 프로의 향수

1986, 김희애의 테마 에세이 "눈 오는 날의 추억"


1986년 12월, FM 라디오 프로 <김희애의 테마에세이>에서 '눈 오는 날의 추억'이란 주제로 글을 공모했었다. 당시 대학 2학년이었던 나는, 재수가 끝날 무렵이었던 어느 눈 오는 날의 추억을 회상하며 글을 써서 보냈었다. 오프닝 음악을 미리 녹음해 두고 며칠을 라디오 앞에 대기하며 녹음을 준비했지만,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갑자기 내 글이 흘러나오는 바람에 결국 시작 부분 녹음을 놓치고 말았다. 서랍장 안 묶은 테이프들 사이에서 운 좋게도 그때의 녹음테이프를 찾아냈다. 무려 37년 전의 녹음테이프이다. 우연이도 그 상대 당사자가 당시 이 방송을 들었고 친구들 있는데서 내게 미묘한 뉘앙스로 그 사실을 말했었다. 난 살짝 당황했지만 대충 웃음으로 얼버부리며 그 상황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넘겼다. 어린 시절의 이야기라 유치하고, 상대도 의식되고 해서 발행을 놓고 오랜 시간 망설였다. 그러나  어린 날 추억의 한 자락으로서, 자서전 같은 내 브런치에 이 글을 올리기로 맘먹었다. 녹음 파일도 같이 올리고 싶었지만 실행이 되지 않아 아쉽게 원고만 올린다.


' 오는 날의 추억'

....

(녹음을 놓쳐 시작 부분은 소실)


입시를 앞두고  남들은 촌각을 다투며 마지막 피치를 올리고 있을 즈음 난 왜 그 애를 그토록 좋아하게 되었던가.


얼마 안 남은 시간을 효과적으로 활용한다는 핑계로 그 애와 난 학원 강의도 빼먹고 자주 남산 도서관에 가곤 했다. 공부 중에 간혹 날 불러내는 그 애에게 괜한 짜증도 내고 그만 가자는 제안에 기어이 폐관 시간까지 남을 것을 고집하곤 했던 나였지만 정작 그런 나의 연습장은 공부의 흔적보다는 서투른 솜씨로 그려본 그 애의 모습과 이름 등으로  메꿔지기가 일쑤였다.


시험이 끝나고 결과를 기다리는 초조함을 달래기 위해 미술학원을 다녔다. 어쩌면 고통을 덜어보기 위함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난 흰 켄트지 위에 아그리파를 옮기면서도 마음으론 항상 그 애를 그리고 있었고 때론 그리움에 못 이겨 절로 핑 도는 눈물을 입 꼭 깨물어 감추곤 했었다.


그 애가 잠시 시골에 내려가 있을 무렵 어느 날, 그 날밤 하늘은 얄미우리만치 많은 눈을 퍼부어 주었다. 저녁 늦게 내리기 시작한 눈은 금세 소복이 쌓여 학원 친구들은 제각기 밖으로 쏟아져 나가 눈싸움을 하며 소란을 피웠다. 그날따라 더 애타게 스미어오는 그리움을 애써 삼키면서 묵묵히 붓질을 하고 있는데, 누군가 옆으로 조용히 다가와 앉았다. 난 하마터면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하였다. 심술궂게도 미소만 머금고는 내가 바라볼 때까지 말없이 기다리던 사람은 바로 그 애가 아닌가! 까마득한 하늘 가득 쏟아지는 흰 눈이 모두 내 것인 듯싶었다.


우린 웃고 떠들고 노래하며 그렇게 장난스레 몇 정거장을 지나쳐 걸었다. 그때 그 애가 살며시 내게 물어왔다.


"너 누군가 좋아하고 있지?"

"어! 어떻게 알았어.. 그래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무척 좋아하고 있다"


난 눈이 쏟아지는 하늘을 향해 마음속으로 고집스럽게 외쳐 보았다.


'그래, 어린 왕자 널 무지무지 좋아한다! 어쩔래?'





(녹음에는 방송국에 임의로 끝에 한 소절을 더 첨부하여 방송되었으나 어색해서 .)


DJ 김희애는 러브스토리의 눈 오는 날의 한 장면이 기억된다며 마무리 멘트를 남겼다. 에세이 낭독 끝에 윤수일의 '우리의 만남'이란 곡이 흘러나왔다. 처음 듣는 곡이었는데 내 스토리와 분위기가 잘 맞아 듣기 좋았다.


https://youtu.be/JtT9gncAHtQ

'우리의 만남은' -윤수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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