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건진 것들 / Temperature
며칠 전, 차가워진 아침공기에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 평소처럼 EBS 라디오를 듣는데, 이 날은 다른 사연보다 유독 노르웨이에서 날아온 이야기가 귀에 꽂혔다. 한국도 갑작스레 찾아온 겨울날씨에 당혹스러운 분위기인데, 노르웨이는 일찌감치 꽤 추워졌단 이야기였다.
노르웨이, 이젠 오후 2시부터 서서히 어두워진다는 그곳에서 한 한국인이 우중충하고 어두워진 날씨가 꽤나 '을씨년스럽다'며 햇볕을 보고싶어요~~라는 바람을 전했다.
아무튼 그 말을 듣는데 어렴풋이 어원이 떠올랐다. 얼마 전 읽었던 일반상식 책에서 '을씨년스럽다'를 본 기억이 났다.
을사년-> 을싸년-> 을씨년-스럽다.
이 말은 우리나라가 일본과 불합리한 을사조약을 체결했을 때, 전국적으로 분위기가 싸하고 스산했는데 이런 '을사년'의 분위기에서 비롯된 말이란다. 유래처럼 '을씨년스러운 날씨'는 항상 수능을 앞두고도 나타났다.
올해는 심지어 일주일이 미뤄졌는데도 계속 쌀쌀하더니 급기야 수능 당일날, 어떤 곳에선 눈발이 휘날리기도 했다. 이렇게 건조하고 차가운 공기가 느껴진 건 비단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십년 전부터 다시 꺼내봐도 그해 겨울기운이 고스란히 와닿는 장면들이 있다.
그래서 연도별로 정리해보았다.
2007년부터 10년 간 여기저기 쏘다니며 겨울을 맞이했던 나는, 시리도록 차갑거나 가끔은 따뜻하게 다가오는 '을씨년스러운' 날들을 볼 수 있었다.
Daily. Korea & Turkey. 2007~2017.
Nikon FE2, D5000
Canon 5D, 5D MARK III
2007년, Nikon FE2
대학교 1학년 때, 한참 필름카메라를 찍고 다녔다. 흑백필름만 장착하다가 친구들이랑 놀이동산을 간다고 간만에 칼라필름을 넣었다. 발을 동동 구르는 추운 날씨였지만 스무 살에 에너지 넘쳤던 네 명의 여대생은 그저 꺌꺌거리며 혈기왕성(?)하게 수다를 떨었다. 이런 날씨라도 롤러코스터 한 시간 정도 기다리는 거는 꿀이었던 시절! 정신없이 수다를 떨던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살짝 허리를 틀어 우리가 탈 롤러코스터를 필름에 담았다.
2008년, Nikon FE2
하루는 학교에서 자원봉사활동을 갔다. 결손가정 아이들과 놀아주며 청소, 문화교육 등을 했는데 나는 한참 바닥을 쓸다가 허리를 들고 이 창문을 발견했다. 방금 전에 왔다간건지? 장난끼 가득한 꼬맹이들이 창밖에서 흔적을 남기고 사라졌다. 녀석들의 온기가 잔잔히 남아있었다.
2009년, Nikon D5000
2010년, Nikon D5000
춥다. 보기만 해도 을씨년스럽다.
겨울보다 더 겨울같은 장면들로 하늘과 땅이 뒤덮였었다. 2009년과 2010년은 나에게 어느 겨울보다 무거웠던 시절이었다. 힘든 사건이 커다랗게 닥쳐왔지만 인생에 전환점은 그렇게 격동적이지만 않다는 걸 알았다. 생각보다 세상은 평화롭게 돌아갔다. 파이팅 넘쳤던 대학생 시절, 큰 일을 겪고 얼마안된 3,4학년은 평소처럼 대외활동과 스펙쌓기에 전념한 나에게 무난한 날들로 채워졌다.
2011년, Nikon D5000
시간이 흘러, 엄마와 처음으로 함께 해외여행을 갔다. 목적지는 터키와 그리스. 9박 10일 일정 중, 하루는 터키의 시골숙소에서 바깥을 바라봤다. 시린 저녁풍경은 손을 비비게 만들었다. 날이 더 어두워지며 하나 둘, 굴뚝마다 연기가 피어나고 집집마다 가족끼리 밥그릇을 달그락거리며 저녁을 먹을 거만 같았다. 겨울에는 온 가족이 다같이 뭉쳐야 따뜻~한 건 동서양 막론하고 진리!란 생각이 들었다.
2012년, Nikon D5000
대학원 생활과 함께 몇몇 대외활동을 하던 2012년, 춘천낭만시장에서 학생들이 대외활동 하는 장면을 찍다가 귀부인을 발견했다. 대외활동 현장스케치에 집중해야해서 다급한 마음에 이 장면을 찍으며 사진이 흔들렸다. 어느 집 귀부인이 입을 거 같은 옷을 후다닥 찍고 돌아섰다. 사실 나도 한참 시린 손을 주머니에 넣으며 뛰어다닌 참이라 하나 사입어보고 싶었다. 차가운 겨울시장에서 보기만 해도 따뜻했던 아이템.
2013년, Nikon D5000
빛이 반사된 것이려니 했는데 눈부신 것도 아니고, 따뜻한 것도 아니고, 여의도 높은 빌딩을 차갑게 감싼 이 햇볕은 대체 무엇이었는지. 렌즈를 갖다대고 온기를 느껴볼래도 느낄 수가 없었던 도심 속 공기였다. 서울에서 맞이한 겨울은 고향에서 느낄 수 없었던 냉정함이 느껴질 때도 있었다.
2014년, Nikon D5000
그래도 어느 유아센터에 촬영갔을 땐, 햇볕이 따스하게 들어오는 모습이 너무 좋아 찍었다. 아이들이 갖고 놀 거 같은 장난감이 천장아래 햇볕 속에서 댕글거리고 있었다. 그러던 사이, 계단위에 잠시앉아 쉬던 내 엉덩이는 점점 차가워져 갔고, 아쉽지만 이 장면은 더 바라보지 못했다. 황급히 따뜻한 사무실로 대피했다.
2015년, Canon 5D
겨울에도 비가 오는 날이면 특히 더 가고싶은 단골카페가 생각난다. 겨울비는 서슬서슬 내리며 추위를 잠시 덮어주는 척 하면서도 입김이 호호 나오게 만든다. 이런 날씨일수록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재즈를 들으면 온 몸이 따뜻해진다. 입과 귀에 온기를 채우고 앉았기에, 서늘한 창앞에 시린 것들도 추위에 떨지 않고 찍을 수 있었다.
2016년, Nikon D5000
한강은 추울수록 더 숨가쁘게 달리는 맛이 끝내준다. 그런데 이 날만큼은 너무 추워 천천히 걸으며 사진만 찍었다. 얼어붙은 한강에 배들은 꼼짝없이 갇혔고, 저녁이 되며 새벽같은 공기가 폐속 깊숙한 곳까지 침투했다. 수험생활, 취업준비 등 힘든 시절에 겨울이 되도 항상 내달렸던 한강. 나에게는 이렇게 차가운 모습도 포근하게 느껴진다. 해가 슬슬 져가며 강 건너편 연기는 어둠에 사라졌고, 그렇게 내 마지막 20대 겨울도 사라졌다.
2017년, Canon 5D MARK III
며칠 전, 집으로 가는 길에 하늘이 너무 청명한 날이 있었다. 맑은 구름이 떠다니고,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딱 그런 느낌이었다. 밤이 되어도 깨끗한 하늘이 예뻐 바로 카메라를 들고 따릉이를 밟았다. 내가 좋아하는 달리기 코스에서 항상 눈여겨 봐왔던 건 삼각대를 대체할 것들이었다. 몇몇 스팟을 정해놓고 야경을 열심히 찍었다. 이 장면을 찍고 잠시 옆을 보니 또다른 찍사들이 나타나 사진을 찍고 있었다. 각종 장비를 멋있게 채비한 그들과 달리 동네주민st인 나는 다시 따릉이 위에 올라타 더 먼 곳으로 쌩쌩 달렸다. 생각했던 거보다 그날 건진 사진들도 몇 안되지만 너무 추워서 이러다 카메라가 깨지는 건 아닌지 별 걱정을 다했다.
'으아, 진짜 춥다!' 소리 절로나오며 이불에서 나오기 싫어진게 바로 이 다음날부터였다.
2009년, Nikon D5000
이 을씨년스러운 주제를 떠오르게 한 건 바로 이 사진이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덧붙여본다.
12월이 다 끝나가던 그 해, 같이 사진을 좋아했던 대학선배랑 불국사에 사진을 찍으러 갔다. 무슨 얘기를 했는지 기억도 안나지만 이런저런 수다를 떨며 간 김에 동리문학관도 구경하고, 겨울에 볼 게 없을 거만 같았던 토함산 일대에서 제법 많은 걸 보고 왔다. 이유는 몰라도 그때 선배나 나나 20대 중반의 나이, 졸업을 앞둬서 그런지 이 노을처럼 적적하게 한숨을 쉬며 내려왔다. 곧 100세를 앞둔 사람들처럼.
그런데 이제 그때보다 더 무서운 30대를 맞이했다. 아이러니하게 지금은 30대 중에서 가장 젊은 서른이라며 내 앞길이 창창히 밝단 정신승리에 심취해있다. 역설적으로 20대가 더 을씨년스러웠던 시기였던 거 같고, 30대는.. 철이 안든건지 앞으로 밝은 나날들만 가득할 거 같다.
그런 의미에서 10년 후, 40대엔 아주 뜨겁디 뜨거운 날씨를 주제로 사진을 찍어보겠다!
10년 간 찍은 사진들을 정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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