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저녁으로 감자찌개를 끓여달란다. 된장찌개가 남아있어서 재활용하려던 참이었다. 귀찮음을 꾹 참고 감자찌개를 끓여 한 상 차려주었다. 다 먹은 뒤 설거지를 마치고 방에 들어가려는데 또 사과를 깎아오란다.
맞벌이하면서 왜 나만 밥을 차려야 되는지 늘 궁금하다. 이 의문은 언제 해소될 것인가.
대체 언제? 하면서 단전에서 끊어 오르는 화를 꾹 눌러본다.
이때 칼에 손을 베었다. 엄지손톱 밑인데 좀 깊었는지 피가 많이 나온다.
하필 약상자가 소파 곁이라 남편이 앉아 있는 소파 근처로 다가갔다. 이때 남편은 나를 한번 쓱 쳐다보더니 "손 베었구나." 하는 것이다. 화가 난 상태라 자존심이 상해 몰래 가져가려 했는데.
어떻게 알았냐고 물어보니, 남편이 하는 말.
"당연히 알지. 같이 산 게 얼만데. 내가 또 당신 허즈밴드니까."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내 성이 허 씨니까 her's, 또 내가 잘 다치니까 밴드를 붙여줄 일이 많음을 아재식으로 개그 친 것이다. 나름 기발하다고 생각했다. 엄지손톱 밑이라 혼자 붙이기 까다롭다고 느꼈던 참인데.
남편은 꼼꼼한 성격답게 소독하고 연고 바르고 이중으로 밴드를 붙여주었다. 방금 전 미움이 녹는 순간이다. 닥터밴드인가 하는 영화가 있었다.
환자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상처보호밴드 같은 의사의 이야기다.
밴드는 상처가 나기 전엔 필요가 없다. 아이들이 어릴 땐 하루가 멀다 하고 동이 났던 물건이다. 그래서
장을 볼 때마다 여유 있게 사서 쟁여두었지만 지금은 구입한 지 몇 년 지나 색이 바랜 밴드들뿐이다, 접착력이 많이 떨어진다.
부부의 세계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그 드라마를 보진 않았지만 화제성 때문에 요약본을 본 적이 있다. 그중 생각나는 장면이 있다.
남편이 차도로 뛰어들었지만 다행히 살게 된 순간, 이때 김희애가 남편을 끌어안고 같이 우는 것이다.
아무리 죽도록 미워도 부부란 그런 것이었다.
오랜 시간 함께하면서 엉성하지만 한 덩어리로 뭉쳐져 가는 존재. 너나 할 것 없는 순간을 느끼는 존재. 미움인지, 연민이지 사랑인지 잘 모는겠는 존재.
미운 우리 새끼라는 프로에서 '미운'이란 뜻의 함축성을 느꼈다.
'미운'이란 이런 게 아닐까.
즉
죽도록 사랑하는,
너무나도 불쌍한,
내가 잘못해서 저런 것 같은,
내 팔자인 것 같은,
다 내 잘못 같은,
그래도 곁에 있었으면 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