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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윤숙 Aug 12. 2023

난닝구 20장을 보내드렸다.

앞으로 내가 입을 속옷은 몇 벌이 될까?

잼버리 K -pop 콘서트를 보던 중이었다. 3일 만에 급조된 거라 방송사고는 나지 않을까 걱정이 들었다.  대부분 이름도 모르는 아이돌들이라 공연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만 한숨이 나왔다.

"사흘에 피죽 한 그릇도 못 먹나? 왜들 저렇게 말랐대. 소속사에서 경비 아끼느라 밥도 잘 안 주나 봐."

 곁에서 듣던 남편이 혀를 끌끌 차면서 말했다. "당신도 이제 할머니 다됐어. 보통 저런 몸매를 보면 몸매 좋다고 감탄하는데. 딱 우리 할머니가 하시던 말투네."


그러고 보니 '피죽'은 먹어본 적도 없는 음식이다. 옛 어른들의 클리셰가 튀어나온 것.


인터넷으로 남편 티셔츠를 주문하다가 친정아버지 옷도 같이 사려고 전화를 걸었다. 어떤 색깔이 좋으시냐, 사이즈는 어떤 걸 할까요 하고 묻자 친정아버지가 기운 없이 말씀하신다.


"됐다. 옷은 무슨 옷이냐. 그냥 난닝구나 몇 개 사서 보내라."

하시는 것이다.


친정아버지는 2년 전 뇌졸중으로 쓰러지셨다. 올해 한국나이로 88세신데, 편마비가 와서 종일 앉아있거나 누워만 계신다. 외출은 두 사람이 거들어야 겨우 한다. 외출복은 있는 옷도 다 못 입을 것 같다고.


그러자 러닝셔츠를 몇  보내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며칠 후 친정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왔다. "뭐 하러 그렇게 많이 보냈냐? 그리고 티셔츠는 왜 사서 보내. 비싸 보이던데."

 

내가 그랬다. "속옷은 자주 갈아입어야 하잖아요. 그리고 집에서 예쁜 옷이라도 입고 있어야 요양보호사에게도 예의고요."


친정아버지가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던, 산송장 취급받는 90세가 되어가신다. 하지만 요즘은 90세 넘은 노인들이 워낙 많다.


각해 보면 예쁜 속옷은 자기에게 주는 선물이다. 남이 안 보면 어떤가. 나에게 보이는 것도 중요하다. 내가 행복해야 남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걸그룹, 아이돌들의 옷은 속옷을 형상화한 것이 많다. 크롭티에 배꼽을 드러내고 바지도 옛날 입던 속고쟁이 같다. 어제 한 걸그룹 멤버는 여성 슬립 같은 옷을 입고 나와 민망하기까지 했다. 남자아이돌들은 힙합바지 속에 입은 팬티의 밴드를 드러내기도 한다.


자기 몸매에 대한 자신감을 넘어서 자신의 속옷까지 드러낼 정도로 자기애가 강한 세대라서일까. 우리 땐 속옷의 용도란 게 몸을 꽁꽁 싸매는 거였고 구멍만 뚫리지 않으면 평생이라도 입을 기세였다.


친정아버지 세대의 러닝셔츠들은 디자인이랄 것도 없었다.  반팔형이냐 나시형이냐 정도. 모두 삶아 입기 쉬운 흰색의, 똑같은 디자인의 러닝셔츠들.


새 러닝셔츠를 20장이나 갖게 된 친정아버지는 한숨을 쉬셨다. 이것들을 앞으로 몇 개나 입겠냐며. 


늘어진 흰색 난닝구. 우리 아버지 세대하면 떠오르는 몇 개의 상징 중 하나다. 그리고 친정아버지 난닝구 중 몇 개는 끝내

새것으로 남겨질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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