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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디 Jul 02. 2023

좀비물에서 건진 삶의 대전제

너, 행복하니?


 모처럼 주말에 나가 놀려고 지하철을 탔다. 보통 서울에 갈 때는 운전을 하지만 저녁에 술 약속이 있어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하필 오늘 폭염이라더니 에어컨이 없는 실외는 잠깐만 걸어도 땀이 줄줄 난다. 그야말로 7월 1일 다운 여름 날씨다. 어제저녁에 세수를 하고 양치를 하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올해도 이렇게 반이 갔구나...


상반기 내내 나를  뜨게 만들었던 감정의 소란스러움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고, 나의 시야를 가렸던 허상들이 걷히면서 나는 마음이 몹시 급해져 버렸다. 퇴근하고 나서가 더 바쁘고, 자정을 넘겨 1시~2시에 자는 것이 다반사다.


이틀 전, 계획했던 일 하나가 마무리가 되어 후배직원이자 또래인 동료직원을 만나 술 한 잔을 했다. 한잔 두 잔 들어가고 나서 내가 물었다.


"이거 나만 그런가, 전 요즘 너무 불안해요. 지금 40대인데 손에 쥔 건 아무것도 없는 거 같고. 그래서 퇴근하고 엄청 분주하게 지내요. 잠이 안 오기도 하고요. 주임님은 안 그래요?"


나와 입사는 10년 넘게 차이나지만 나보다 나이는 두 살 위고, 나처럼 미혼인 40대 오빠(?)의 상태는 어떤지 궁금했다. 나 혼자만 느끼는 감정이 아니기를 바라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어? 난 행복한데요?"


흔치 않은 "또래" "싱글"과 공감대 형성 실패.

나는 이 헛헛한 마음을 정녕 누구와 나눠야 한단 말인가. 그래 행복한 40대도 있지, 뭐 눈에 뭐만 보인다고 다 나처럼 보려고 들었다. 생각해 보니 주임님은 나와 달리 사람이 참 선하고 사무실에서도 늘 크게 웃는 분인데 나의 질문이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


그다음 날 아침까지 '행복'하다는 주임님의 그 말이 계속 머릿속을 돌아다녔다.






 몇 주 전 주말, 혼자 집에서 밥을 먹으면서 TV채널을 마구잡이로 돌리다가 월드워 Z 영화에 멈춘 적이 있었다. 이미 본 영화였지만 무려 10년 전 개봉한 영화라 그런지 장면 장면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영화가 아직 초반이구나 하는 정도만 짐작될 뿐이었는데, 일단 나는 브래드피트 is 뭔들인 옛날 사람이기에 그를 보기 위해서라도 채널을 고정했다. 어느 정도 보다 보니 옛날에 봤던 장면이 조금씩 생각이 났다. 그리고 브래드 피트 저 양반은 어쩜 여자도 소화하기 힘든 단발이 저렇게나 어울릴까 하는 생각을 하며 보고 있었다.


그러다 머리를 훅 치는 장면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제리(브래드 피트)는 천식을 앓고 있는 큰 딸의 약을 구하러 마트에 간다. 마트는 식량 등의 생활필수품을 챙기러 온 사람들로 이미 아비규환의 상태.

제리가 한 남자의 도움을 받아 약국 코너에서 딸의 약을 구하고 나오는데 아내가 낯선 남자에게 붙들려 끌려가는 중이었다. 아내를 구하는 과정에서 제리는 총으로 그 남자를 사살하고 만다. 총소리가 울린 바로 그때, 경찰관 한 명이 뛰어 들어오고 제리는 두 손을 올려 총을 쏜 사람이 자신임을 밝히는 자수의 의사표시를 한다.

 그런데 정작 경찰관은 지금 이 판국에 총소리, 사살은 아무 상관없다는 듯, 제리를 지나쳐 식품코너로 돌진해 자기가 필요한 식량들을 챙긴다. 경찰관의 직진하는 모양새가 마치 좀비 같아서 처음에 나는 경찰복 입은 좀비를 등장시킨 건가 했다.

 그건 재난이 닥친 상황에서 (일반 사람들이 마트를 털듯) 경찰복입은 경찰관조차 살기 위한 식량 챙기기에 혈안 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혼란의 정도를 단적으로 드러내 준 장면이었다.


 그 장면을 보는데 아, 내가 이래서 재난물 영화를 좋아하지 하는 생각을 했다. 재난물 특유의 스케일과 볼거리,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쫄깃한 구성의 스토리 그 자체도 너무 매력적이지만 무엇보다 언제나 내게 삶의 대전제를 일깨워주기 때문이었다.

 

모든 인간은 살아남고자 한다.


 기존의 질서가 작동하지 못할 정도로 세계가 무너지면, 살면서 쫓았던 모든 것들이 일순간에 무의미한 것이 된다. 생물학적으로 살아남는 것이 제1의 목표이자 최종 목표기 때문에 오직 그것에 도움이 되는 것만 의미가 있다. 이 과정에서 재난물 영화는 내 삶의 가운데를 건드리는 질문을 툭하고 던진다.


살아남아 있는 그 자체가 의미고 본질인 건데, 거기에 "잘" 살아남으려고 지나치게 발버둥 치는 것은 아니냐고. 진짜 뭣이 중헌 지를 알고 살고 있는 거냐는 물음들.


'살아있는 상태'를 너무 당연한 것이라 여겼다. 

'살아남다'라는 동사를 가볍게 여기고 (남보다 더) '잘' 살아남아야지 하는 부사에만 초첨을 맞췄다.

실제 위 질문들은 평소에 내가 제일 쉽고 빠르게 잊는 것들이다. 그래서 일상의 나는 행복하기가 어려웠나 보다. 


 나이에서 오는 압박, 이 와중에 싫어 죽겠는 회사를 나오려면 어느 정도 준비가 되어야 한다는 조급함까지 더 해져 나 스스로를 달달 볶았던 최근을 돌아본다.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최초의 명제는 이룬 건데 이렇게 글까지 끄적이다니 대단해,라고 나 자신을 토닥여준다.

 

 물론 월요일에 출근하는 순간부터 저 싫은 인간들 안 보려면 나 '잘' 살아야 여기 뛰쳐나가는데라는 쪽으로 금세 기울겠지만... 그들도 지 살겠다고 발버둥 치려고 저러나 보다 하는 인류애(?)도 가져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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