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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디 Sep 04. 2023

Better than your 루이비통

마흔의 노동


얼마 전 유관기관 직원들과 점심식사를 했다. 나보다 서너 살 어려 보이는 여자 과장과 인사를 나누며 명함을 교환했는데 그녀의 명함이 루이비통 카드지갑에서 나오는 것이 눈에 띄었다. 식사를 마치고 일어설 때 보게 된 그녀의 미니백도 루이비통이었다.

식사 장소가 사무실 근처였기에 나는 가방을 들고 가지도 않았고, 평소 내가 회사에 들고 다니는 카드지갑은 가방을 샀을 때 사은품으로 얹어준 것이었다. 나도 장착하려고 작정했으면 들고 갈 게 없진 않았건만 너무 없어 보이게 막 나갔나 하는 불필요한 후회(?)를 잠시 했다.


소싯적 남들 눈에 꿀리기 싫어 저질렀던 수많은 소비가 얼마나 부질없는지 다 깨달았다 생각했는데 루이비통의 존재감은 앙증맞은 그 크기와는 개였나 보다.


그러고 보니 당시에는 늦었다 취급받던  여자 나이 이십 대 후반으로 취업시장에 뛰어들었을 때도 난 남들한테 말할 때 쪽팔린 회사는 아예 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이렇다 할 취업용 스펙 한 줄이 없었던 주제에 무슨 배짱이었는지는 모르겠다만, 이십 대의 나에게 타인의 시선과 평가는 그 정도의 무게였다.






(그런 걸 신경 쓰는 것도 나의 일부가 분명했지만) 나라는 사람에 대한 깊은 고민이 생략된 이십 대의  선택은 마흔이 될 때까지 내 발목을 잡았다. 매 순간 노동의 가치와 의미에 대해 생각하고 물고 늘어지는 숙제를 하게  것이다.  내 하루 중 3분의 1 이상 (심할 때는 2분의 1)이 소모되고, 앞으로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칠 노동과 노동환경은 상상이상으로 중요한 것이었다.


아무도 내준 적 없는 그 숙제에 대해 마흔이 된 이제야 마침표를 찍었는데 노동에서 가치와 의미까지 찾으려고 했던 내가 욕심이 지나쳤다는 헛헛한 결론으로 끝이 났다.


 비효율적인 조직 시스템과 기이한 승진체계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던  시절, 돈을 받았으니 나에게 주어진 일은 완수해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노동의 신성함을 몸소 증명한 적이 있었더랬다. 젊었고 순진했던 탓도 있었지만 이건 두 말이 필요 없는 그냥 상식이었다.


그러다 매일 야근을 해도 일이 쌓여있는 직원들을 남겨놓고 혼자만 칼퇴복지를 고수하며 쏜살같이 달아나는 책임자의 뒷모습을 보면서  그 상식에 후드득 금이갔다.

나보다 업무에 대해  많이 아는 것도 일을 더 하는 것도 아니요, 책임을 지는 건 더더욱 없는 당신이 왜 책임자냐 본인과 직장동료의 노동을 대할 때 최소한의 예의조차 없는 당신 따위가 감히 나를 평가하냐 하는  의문이 나를 황폐하게 만들었다. 승진누락으로 독기와 불만이 차오를 대로 차오른 나에게 저딴 말도 안 되는 작자를 상사로 붙인 회사도 내 노동을 이중으로 모욕하고 있다는 생각에 당시 나는 점점 미쳐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가지 않고 버텼던 건 그래 나를 무슨 근거로 어디까지 짓밟나 두고 보자 하는 오기와 준비 없이 하는 퇴사에서 오는 소득 크레바스를  견딜 자신이 없어서였다.


실제로 입사 이후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부정한 적 없는 사실이 하나 있는데, 나의 노동환경이 매슬로의 욕구 피라미드에서 말하는 생리적 욕구와 안전의 욕구를 충족시키기에는 꽤 쓸만하다는 것이다. 다만 그 윗단계의 애정과 소속의 욕구, 존경의 욕구, 자아실현의 욕구를 전혀 채워줄 수 없기에 삼각형의 피라미드가 아닌 사다리꼴의 뜀틀이었다면 완벽했을 수 있다.






 지난달 통계청에서 발표한 '사회 조사로 살펴본 청년 의식 변화'에 대한 결과를 기사로 접한 적이 있다. 내가 관심을 가진 부분은 단연 노동과 관련한  응답이었다. 청년들이 직업을 선택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인 1위가 수입, 2위가 안전성이었고 그에 따른 당연한 수순으로 선호하는 직장 1위가 공기업이었다.


지극히 보편적인 바람이고 과거 내 의식의 흐름과  선택 또한 그랬기에 이 결과에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다.

다만 기사를 읽으면서 그 바람이 변질된 내가, 이 바닥에서 소수자인 내가 이상한 건가 싶은 생각을 잠시 또 했다.


세상에는 나를 시험에 들게 하는 루이비통이  왜 이리도 많은 걸까.


나 지금  맞게 가고 있는 건가 하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고, 현  노동의 드라이브에 브레이크를 걸었던 많은 사람들이 마흔이라는 나이에 전환을 꾀했던 것을 되새긴다. 그리고 내 나이 마흔이 돼서야 단호히 다짐을 한다. 남이 내 준 숙제는 더 이상 풀지 않겠다고. 특히 노동에서만큼은.


나의 2000년은 SKY 가려고 막바지 용을 썼던 고3, 그때 태어난 비오가 불러준다.


Counting stars 밤하늘의 펄

better than your L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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