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저의 사전적 의미는 '일이나 공부 따위를 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운 시간, 또는 그 시간을 이용하여 쉬거나 노는 일'을 뜻한다.(사전적 의미를 찾아 읽는 것만으로 가슴이 뛰는 마법의 단어다)
정해진 것이 단 하나도 없었던 시절,나에 대한 무언가를 정해보겠다고 공부할 때는 바쁘게 지내는 와중에도 희한할 정도로 시간이 남았다.
온전히 나만을 위한 시간이 흘러넘쳤지만 보일 듯 말 듯 가리워진 길에 대한 불안감으로 레저를 즐길 심리적 여유가 없었을 뿐이다.물론 돈도 없었다.
취직을 하고 나서는 그 많던 시간이 쥐도 새도 모르게 날아갔다. 대신 시간을 판 돈이 생겼고 남는 시간에 그렇게 번 돈을 쓰며 보내는 기이한 순환이 생겼다. 그때는 또래의 친구와 회사 동료 대부분이 미혼이었기에 주로 함께하는 레저가 많았다.같이 맛있는 것을 먹으러 가고, 술을 퍼마시고, 쇼핑을 하고, 연차 내내 해외를 쏘다녔다.
매 순간을 사진으로 캡처하여 SNS에 실시간 업로드하고 이런 게 돈 버는 맛이로구나를 한껏 누렸다. 시간과 돈이 적절(?)한 비율로 버무려졌다고 만족했던 그 시절 사진 속의 나는 비현실적으로 웃고만 있다.
사십 대를 바라보다 접어든 최근 몇 년의 레저 양상은 예전과는 사뭇 다르다. 상당수의 친구들과 회사동료들이 육아라는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갔고 마침 코로나라는 재난도 있었다. 그래서 지금의 레저는 '같이'가 아닌 '혼자' 하는 걸로 채우고 있다.
나이 탓인지 체력 탓인지 툭하면 캐리어를 쌌던 방랑벽은 잦아들어 요즘 내가 가장 좋아하는 레저는 혼자 미술관 가기, 혼자 책 읽기다. 사실 사십 대가 되어 좋아졌다기보다 예전부터 좋아하던 활동이었는데, 혼자의 시간이 많아지면서 더 자주 하게 되었다. 무언가 느끼고 이해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나에게 그 어떤 때보다 의미 있는 놀이가 되었다.
어제 조카들을 보러 오랜만에 동생 집에 갔다. 저녁을 먹는데 최근에 골프를 시작한 동생이 나와 올케에게 둘 다 골프를 배웠으면 좋겠다고 전도하기 시작했다.
가족사이에서 동생은 뭐 하자 하면 별다른 의견 없이 따라오는 쪽이지 다른 사람들에게 먼저 하자고 제안하는 쪽이 아니다.살면서 동생이 어떤 것을 그렇게 적극적으로 권유하는 걸 처음 봤다.
트라이씨 기업심리학 칼럼에서 읽었는데 인간은 만 39세가 되면 새로운 장르의 음악을 듣지 않을 확률이 95%, 35세가 될 때까지 먹지 않았던음식을 이후로도 먹지 않을 확률이 95%, 23세가 될 때까지 입어보지 않았던 옷을 그 이후로도 입지 않을 확률이 95%라고 한다.(로버트 새폴스키 미국 스탠퍼드대 신경생리학자 연구 참조)
그런데 나보다 한 살 어린 만 39세 동생이 새로 시작한 골프에 대해 신나서 말하는 모습이 퍽 좋아 보였다.사십 대의 레저는 이미 해왔던 것이 더단단하고 깊게 쌓여가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는데새로운 것을 얼마든지 시도할 수 있는 나이였던 것이다.
주어진 과업이 아닌 자발적인 선택에 의한 초보자가 뿜어내는 특유의 에너지가 있다.놀이를 할 때 아이들의 모습처럼 눈에서 빛이 나고 몸의 움직임에선 생기가 돈다. 나이를 그저 숫자로 만드는 데는 자기만의 자유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얼마만큼 즐기는지가 관건이 될 것 같다.
나도 요즘 그동안 생각만 하고 시도하지 않았던 활동들을 레저 스케줄에 조금씩 끼워 넣고 있다. 그중 하나가 미래의 내 취미가 되고, 나를 드러내는 취향이 될지 모른다.
혼자서 책 읽기 시간, 최근에 시작한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불쉿잡(Bullshit Jobs)이란 책을 읽다가 20~30대의 SNS 사진 속 나처럼 큰 소리로 웃은 적이 있다.실성한 사람처럼 웃다 얻은 깨달음, 나는 논픽션에서 픽션을 픽션에서 논픽션을 발견하는 레저에 미친다는 사실이었다.
스페인의 어느 공무원이 6년 동안 근무 시간에 일을 하지 않고 스피노자의 글을 연구하여 스피노자 전문가가 되었다고 스페인 언론이 보도했다.
상사: 자네는 왜 일하지 않는가? 직원: 할 일이 없습니다. 상사: 그런가, 당신은 일하는 척하게 되어 있지 않던가? 직원: 이봐요, 더 좋은 생각이 있어요. 내가 일하고 있는 것처럼 당신이 시늉하는 건 어때요? 당신 봉급이 나보다 더 많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