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회 관련 알림 메시지가 울렸다. 요즘 이런 전시들이 열리고 있구나, 신나게 기웃거리며 몇몇 전시회 표를 구입하다가 유독 낯선 화가의 이름과 시선을 끄는 그림에 멈칫했다. 여행지에서든 일상에서든 그림 보러 가는 일정을 소중히 여기는 나에게 단 한 번도 스친 적 없던 이름이었다.
"베르나르 뷔페"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는 이브생로랑, 프랑수아즈 사강과 동시대의 사람으로 이들이패션과 문학에서 획을 긋는 동안 미술계를 접수한'구상회화의 프린스'였다.
몰랐던 이름에 대한 호기심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검색으로 이어졌고, 그 과정에서 마주한 두 가지 이유로 전시회 관람을 결정했다. 일단 전시회 포스터 그림이 '광대'였고, 운이 좋다면 정우철 도슨트의 설명을 들을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어른이 되기 전 나는 피에로를 보는 것이 그 어떤 공포물을 보는 것보다 더 무서웠다.
웃는 건지 우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과 무언가를 감추려는 듯한 과한 분장이 무척 그로테스크하게 느껴졌었다. 보는 것만으로 께름칙했던 피에로가 달리 보이기 시작한 건 회사를 다니고 직장인이 되고 난 이후부터다. 무대의 종류와 연기의 정도만 다를 뿐, 나 역시 광대와 다를 게 없단 생각을 했던 바로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영악한 쿨함의 정도를 모르고 세련된 애티튜드의 적정선을 모르는 그야말로 무능한 광대.
나의 가치와 나의 생각은 조직의 그것과는 어긋나기 일쑤였고, 그걸 감춰보겠다며 꾸며낸 표정과 과장된 행동은 매번 나를 허하게 만들었다. 그 공허함은 커튼콜 하나 없는 무대 뒤까지 이어져 진짜(?) 내 모습과의 괴리를 상기시키는 식으로 나를 괴롭히곤 했다.
국민학교 때 아무 생각 없이 따라 불렀던 김완선의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를 새삼 찾아 듣고서 이 노래는 정녕 명곡이었다며 가사 한 구절 한 구절을 곱씹는다든지, 미술 전시회를 가서 광대 그림 앞에서 맥을 못 추고 한참을 서 있는 것은 광대에 대해 친근감을 느낀 이후에 생긴 증상들이다.
이런 내가 전시회 포스터가 광대요, 전시회 제목이 천재의 빛:광대의 그림자인 베르나르 뷔페 전을 지나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예술가는 예술가이기전에 사회적 존재기도 하다. 인간에 대한 이해가 깊은 그들이 광대를 작품의 주제로 삼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뷔페 역시 오랜 시간 사랑한 주제 중 하나가 광대였다고 한다. 이번 전시를 안 봤으면 어쩔 뻔했지 싶을 정도로 베르나르 뷔페의 작품 중에는 인상적인 그림들이 정말 많았는데, 역시 나는 천재의 빛보다는 '광대의 그림자'쪽에 마음이 더 뺏기었다. 전시를 볼 때마다 기억하고 싶은 그림 제목은 꼭 메모를 해두는데, 제목을 적은 작품이 가장 많았던 곳도 광대를 다룬 그림들이 모여있는 섹션이었다. 때때로 나조차도 모르겠는 진짜 나, 조직과 SNS 속 꾸며진 광대로서의 나에 대한 초상이 베르나르 뷔페 그림에 있었다.
이번 전시로 그림을 통해 '나'를 조우한 것 말고도 운이 좋았던 게 또 있었는데, 내가 방문한 날 정우철 도슨트의 해설이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그가 쓴 '내가 사랑한 화가들'이란 책을 갖고 있는데, 이 전시회를 가기 전까지 책의 저자와 베르나르 뷔페 전 도슨트가 동일 인물인지 몰랐다. 나중에 검색하다 알게 된 정우철 도슨트는 흡입력 있는 설명으로 관람객들을 몰고 다닌다 하여 피리 부는 사나이로 불리는 인기 도슨트였다. 우리나라 사람들 별명 참 잘 지어, 재밌네 재밌어 이렇게 생각하고 갔다가 (그의 해설을 들으려고) 모여드는 관람객들을 보고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전시회 장 안에 사람들이 이렇게 많았나 싶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의 설명을 듣고 나서 왜 그렇게 사람들이 정우철 도슨트에게 열광하는지 알 것 같았다.
이번 전시회를 통해 알게 된 베르나르 뷔페와 그의 그림은 이제라도 알게 돼서 정말 다행이야 할 정도로 존재 자체가 감동이었다. 그런데 이 베르나르 뷔페라는 예술가와 그의 작품을 적확하게 소개해서 안 그래도 좋은 걸 더 좋아하게 만드는 힘은 도슨트에게 있다는 것을 정우철 도슨트를 통해 알게 되었다. 정우철 도슨트 설명 덕분에 나는 이 글을 쓰기 전에 베르나르 뷔페 그림이 그려진 프랑수아즈 사강의 해독일기를 읽었고, 이 글을 쓰는 내내 베르나르 뷔페의 아내인 아나벨 뷔페의 샹송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