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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디 Jul 06. 2024

돌풍을 맞는 나의 자세


6월 28일, 기대하던 넷플릭스 시리즈 [돌풍]이 공개됐다. 최근에 퀸메이커를 재밌게 보고 나서 김희애, 설경구 주연의 시리즈가 공개예정이란 사실에 스토리도 모른 채 손꼽아 기다렸다. (어떤 배우들은 이름 석자로 작품을 고르는 능력과 연기력에 대해 무한신뢰를 갖게 한다)


넷플릭스를 보다 취향을 저격 당해 밤을 새웠었던 적이 있었기에, 드라마 돌풍은 언제 시작해서 어떻게 쪼개봐야 하나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시리즈가 공개된 첫날이 금요일이라 일단 퇴근하자마자 시작하기로 했다. 등장인물들 사이에서 쉴 새 없이 터지는 사건, 예상을 뒤엎는 전개와 속도감에 다음화 보기- 오프닝 건너뛰기의 연속이었다.





이 시리즈는 제목에 이미 주제가 담겨 있다. 설경구 배우가 연기하는 박동호란 캐릭터를 대면하면 결말을 짐작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심지어 초반 시퀀스에서부터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왜 하려는 건지 한 방에 보여준다. 지금 이 순간, 내가 미치게 궁금한 건 단 한 가지. 그래서 그 돌풍을  "어떻게" 보여줄 거지? 가 된다.  


돌풍의 과정은 몹시 흥미롭고 속 시원하다. 등장인물의 욕망과 행동, 그 사이에서의 갈등을 이해하는데 우리 모두 정치인일 필요가 없다. 조직과 사회에 속해있는 인간이라면, 한 장면 한 장면 우리가 겪었던 들이 극적으로 표현된 것뿐이라는 걸 쉽게 눈치챌 수 있다.  


돌풍 속 인물들이 명대사를 담담하게 투척할 때면,  비 오는   갓 부쳐낸 파전 한 접시를 앞에 두고 막걸리 한 잔 들이켰을 때의 쾌감이 소환된다.


진실은 이게 문제야. 너무 늦게 드러나거든.  누명은 말 한마디로 충분하지만 무죄를 입증하는 건 천 마디 말로도 부족하다는 거.

거짓을 이기는 건 진실이 아니야, 더 큰 거짓말이지

ㅡ돌풍 4화, 박동호의 대사ㅡ


사자는 아무리 배가 고파도 짐승의 썩은 고기는 먹지 않아.

그래서, 사자가 죽는 거야.

ㅡ돌풍 8화, 정수진의 대사ㅡ


검색사이트에서 돌풍을 검색하면 첫 번째 나오는 키워드로 명대사 속출이 나오는데 결코 과장된 홍보가 아니다.




 이 시리즈를 끝까지 보게 하는 힘이 박동호라는 캐릭터의 고군분투에 있다면, 이 스토리의 매력은 김희애 배우가 연기한 정수진이란 인물에 기대고 있다. 정수진은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의 중심, 소위 운동권 출신의 인물의 변질과 흑화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무식해서 용감한 행동파도 무섭지만, 배울 만큼 배운 사람이 자기 신념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확신하는 것이 얼마나 징그럽고 공포스러운지 잘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극 중에서 정수진이란 인물이 엄중한 표정으로 공정과 가치를 운운할 때마다 실제로 속이 부대꼈다. 고등학교 사회문화 수업 시간, 나의 스승이 먼 산을 바라보며 말씀하셨던 "당한 놈이 높은 자리에 오르면 더 할 수 있다."는 말이 실감 나는 순간이었다.  




이 나이쯤 되니까 동시대의 인간을 존경하는 일 자체가 드물지만, 아주 가끔 그런 감정이 솟아올라 누군가를 칭송하고 싶다가도 쭈뼛거리는 데는 이유가 있다. 내가 열광한 다음 머지않아 그의 연관 검색어가 뇌물, 배임, 폭행, 갑질, 마약, 성범죄, 비리, 조작 등등으로 얼룩질 것 같은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되면 나는 망연자실하여 사람 잘 못 본 어리석은 내 눈을 찌르고, 경솔하게 나불거린 내 입을 꿰매고 싶을 것이다.


선과 악, 정의와 부정의를 구분 짓는 것이 무의미한 요지경의 세상.

이제 나도 사십 대에 접어들었으니, 세상이 이렇게 된 것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나란 존재의 영향력은 미미하지만) 내가 무언가를 했기 때문에, 내가 무언가를 하지 않아서 이 세상의 현주소에 어떤 식으로든 일조했을 것이다.


돌풍을 보고 나서 나는 내 자리에서 어떤 돌풍... 아니 어떤 미풍을 일으킬 수 있을지 고민해 본다.


(내를 이길 수 있겠나?)

이겨야죠, 당신이 만든 미래가 역사가 되면 안 되니까.

ㅡ돌풍 3화, 박동호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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