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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클레어 Nov 15. 2022

그럼에도 이 생을 사랑하기에, 자찬묘지명을 남긴 정약용

역사인물 탐구 에세이

문도공 열수/사암 정약용 


우리에게는 다산이라는 명칭으로 흔히 알려져 있으나 사실 정약용은 스스로를 다산이라고 자칭한 적은 없었다. 그가 정식으로 사용한 것은 여유당과 열수, 사암이라는 호로 개인적으로는 그가 가장 좋아했을 '열수'를 그의 호로서 칭해서 붙이기로 하겠다.


열수 정약용은 말해 뭐해 한국사 최고의 대학자로 손꼽히는 인물로 한국인이라면 이름 석자만 들어도 역사를 잘 모르는 누구나 바로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이다. 따라서 정약용에 대해서는 워낙 구구절절 알려진 일화도 많고 하니 그걸 살피기보다는 개인적으로 유배 생활이 끝난 후 정약용의 삶에서 내가 느꼈던 바에 대해 써보려고 한다.


내 나이 예순이다.
나의 인생, 한 갑자 60년은 모두 죄에 대한 뉘우침으로 지낸 세월이었다.

이제 지난날을 거두려고 한다.
거두어 정리하고 생을 다시 시작하려고 한다.

진정으로 올해부터 빈틈없이 촘촘하게 내 몸을 닦고 실천하며,
저 하늘이 나에게 던지는 지상의 명령, 나의 본분이 무엇인지 돌아보면서 여생을 마치리라.


위 글은 정약용의 자찬묘지명에 나오는 문구로 나는 이 구절을 한 글자씩 필사하면서 눈물을 떨구었다. 그가 왜 자신의 60년이 죄에 대한 뉘우침으로 지낸 세월이라고 표현했는지, 어떤 마음으로 자신의 60년을 한마디로 정리한 건지 그걸 알기 때문이었다. 



열수 정약용은 서모에게서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막내 동생이 태어나기 전까지는 모든 가족 구성원의 귀여움과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막둥이 4남이었다. 그가 자신의 묘지명에서도 묘사했듯이 화목한 가정의 분위기 속에서 웃어른들의 사랑과 관심을 받으며 건강한 성품을 키우며 명랑하고 쾌활하게 성장했다. 


부친이던 정재원이 지방으로 벼슬을 하러 내려간 동안 어린 동생들에게 부친의 역할을 대신했던 것은 배다른 형이지만 맏이던 정약현으로 그래서인지 정약용의 어린 시절 기억에는 정약현의 집에서 자주 머물면서 큰형수와 놀기도 하고 장난을 치기도 한 것이 크게 자리 잡았다. 그가 큰형수를 위한 묘지명을 남긴 데에는 일찍 세상을 떠난 모친을 대신해서 자신을 자식처럼 사랑해준 그에 대한 감사와 사랑을 되돌려 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어렸던 그가 정신적으로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았던 인물은 정약현의 처남 이벽이었던 것 같다. 웃사돈 이벽은 자신이 공부하고 있던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던 누나를 자주 만나러 왔고, 그가 같이 놀아주면서 어린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삼 형제는 그를 통해 다양한 지식을 접하기도 했다. 


그러니 훗날 서학에 대한 공부를 스스로 해서 깨우친 이벽이 정약용 형제에게 가장 먼저 천주교를 전파하고 이들이 단번에 매료된 것은 그들 사이에 형성되어 있던 오랜 유대관계에서 비롯된 것일 테다. 그러나 종교적인 관점에서 떠나 역사적으로 그리고 이것이 행복하기만 했던 정약용 개인의 인생으로만 본다면 비극의 시작이기도 했다.


천주교의 진리에 매료된 그는 세례를 받고는 신이 나서 이를 자신의 사촌인 윤지충에게 알려준다. 사실 지금의 우리에게 사촌은 가까운 이웃보다도 못할 때가 있지만 조선시대에 '사촌' 간이란 친형제 관계와 다름이 없었다. 특히나 정약용은 자신은 다른 형제들과는 달리 '외형적으로도 외가 쪽을 더 많이 닮았다'라고 표현했을 정도로 외가에 대한 정이 깊었다. 그랬으니 정약용은 자신이 느끼기에 좋다고 생각했으니까 이를 외종사촌에게도 공유하고 싶었던 것일 테다. 그리고 1791년, 진산 사건이라고 흔히 알려진 신해박해로 윤지충은 처형된다. 이것이 정약용의 인생에서 가장 큰 첫 충격이었으며 그의 인생 전후 분위기가 바뀌는 지점이 된다. 


자신이 좋아서 공유한 것으로 인해 친형제 같이 지내던 사촌이 죽임을 당했다. 그때 공범이 있느냐는 문초에 윤지충은 '공범은 없다. 그냥 나 혼자 스스로 깨우쳐서 벌인 일이다." 하며 자신이 천주교 교리를 정약용에게서 들었다는 것을 숨겼다. 


당시 정황이 너무 충격적이었던 만큼 직접적으로 언급한 표현은 없으나 이후 그의 행적을 보면 정약용은 자신 때문에 윤지충이 죽게 된 거라고 자책감을 가졌던 것 같다. 그 기점으로 천주교에 대한 그의 태도는 180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아니 달라진 것처럼 보였다.


그는 자신은 천주교 교리를 더 이상 믿지 않는다고, 특히 제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천주교의 교리는 유학자로서 인정할 수 없다며 천주교와 손절한 것처럼 끊임없이 외친다. 자신이 외관직을 하러 내려간 지역에 천주교인들이 있다고 하면 회유를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1801년에 이르기까지 전국에는 천주교인이 약 만여 명 정도 되었다고 하니 어마어마한 숫자다. 도대체 어찌 된 일일까? 최근 밝혀진 몇몇 사료를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그가 주문모 신부의 입국 사실은 지인 네트워크를 통해 알고 있었음에도 묵인하고 있었던 것 같다는 의견도 있으니 흥미롭다. 


그런데 연구까지 갈 것 없이 인지상정으로 생각해보더라도 조선 땅에 천주교의 씨앗을 뿌린 것은 자신의 성장과정에서 영향을 크게 미친 가장 동경하던 어린 시절의 스승이자 젊은 날의 벗 이벽이었다. 자신의 어린 시절을 지켜봐 주고 스승의 역할도 해주고 벗이 되어준 사람이 자신의 인생을 걸어 서양의 학문에서 종교의 위치로 바꿔 남기고 간 유산이 바로 조선의 천주교이다. 그걸 보통의 사람이라면 그렇게 칼로 무 자르듯 잘라버리고 냉정하게 돌아설 수 있을까? 정약용의 신자 여부, 배교 여부와 상관없이 그는 진심으로 그리고 영원히 천주교를 미워할 수 없었을 것이다.


참 이럴 땐 어떡해야 하나. 자신의 소중한 사람이 남기고 떠난 유산이 자신의 또 다른 소중한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가고 집안마저 멸문의 지경에 이르게 했으니 말이다. 천주교에 대해서 정약용은 끊어내려야 끊어낼 수 없는 애증을 품지 않았을까 싶어 진다.


한 연구논문에 따르면 정약용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도 유학의 조상 제사의 문제를 어떻게 천주교의 교리와 타협할 수 있을까 그 논리를 만드는 연구를 하는데 골몰했다고 한다. 이미 그 시점에 천주교에서 제사를 인정하고 말고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고 새로운 시대를 가져올 수단으로써 변모되고 있었는데 그는 여전히 1791년의 일에 시간이 멈춰있었다는 것이다. 이것만 보더라도 그가 배교를 했건 안 했건 얼마나 윤지충의 죽음에 죄책감을 갖고 있었으며 한편으로는 이벽이 자신에게 남겨준 천주교라는 유산을 포기하고 싶어 하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학계와 종교계는 정약용의 천주교 문제를 두고 그는 천주교 신자가 아니다, 배교했다 라는 주장과 천주교 신자다, 그의 배교는 거짓말이다 라는 주장으로 논쟁하고 있다. 이 문제가 왜 중요하냐면 그 결과에 따라 한국철학사와 한국 천주교회사를 다시 써야 하는 엄청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천주교 신자 여부를 거둬내고 보면 단단함과 꼿꼿함으로 포장된 그 안에 가려져서 울고 있는 나약한 그의 영혼을 마주할 수 있다. 소중한 사람이 남겨준 천주교를 사랑하면서도 미워하는, 그리고 그 모든 일이 벌어진 것은 자신의 탓이라고 울고 있는 그 영혼을 말이다. 




자찬묘지명은 어쩌면 그 스스로 자신을 마주해서 그가 너무도 미운 자기 자신과 화해를 하고 싶었기 때문에 남긴 것이 아닐까 싶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자기를 가장 잘 아는 것은 자신이고 자기가 스스로에 대해 남긴다면 타인의 멋대로인 해석으로 인해 자신의 삶이 왜곡되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정약용은 자찬묘지명에 가감 없이 자신의 빛도 추한 어둠도, 자신이 영향을 받았던 것, 공부했던 것, 자신에 대한 적을 수 있는 그 모든 것을 담았다. 


천주교 교리를 만나 매혹되었던 자신도, 1791년의 일로 큰 충격을 받아 정이 떨어져 배교했던 자신도, 그래서 더욱 부정해보고자 다른 천주교인 탄압에 앞장섰었던 자신도, 그리고 유배 이후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자신이라는 존재를 형성하는 사상의 일부가 된 천주교를 완전히 끊어낼 수도 포기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하는 자신도 말이다. 


물론 자찬묘지명 자체에는 당연하게도 천주교와 관련된 그 어떤 직접적인 표현도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그 면면의 표현을 훑어보면 정약용의 유학이 단순히 순수한 성리학에 기반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건 연구에서도 나온 것이지만 정약용이 집대성한 학문 중에는 이벽의 사고와 비슷한 면이 많다고 한다. 이벽이 직접적으로 남긴 게 많지 않아 확정할 수는 없으나 특히 <중용강의보>에 있어서는 정약용이 어느 부분을 영향받은 건지 출처를 솔직하게 밝힌 대목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천주교가 그의 사상의 일부가 된 것을 인정했다고 표현한 것이다.



그는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반역죄에 해당하는 '천주학쟁이'라고 낙인찍은 자신의 사촌 윤지충과 그리고 그의 삼형 정약종의 묘지명을 쓰지는 않았다. 이 땅에 처음 천주교의 씨앗을 뿌린 자신의 벗 이벽의 묘지명도 말이다. 이들의 묘지명을 쓰지 않은 데에는 정약용은 결국 유학자였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나라를 혼란하게 만든 천주교인으로 죽은 그들을 기리지 않았던 것이다라는 주장이 가장 우세하다. 이건 정약용이 천주교 신자가 아니라는 측의 입장에서 나오는 주장이다. 물론 그럴듯하고, 그랬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나는 정약용이 그럼에도 자신의 죽는 날까지 온 가족이 천주교 신자이던 삼형 정약종의 남은 가족들의 뒷바라지를 하고, 그 집안의 차남이자 자신의 조카인 정하상 바오로와 지속적으로 교류하며 그의 포교활동을 막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가 자신에게 들이닥친 일련의 비극들로 인해 천주교에 정이 떨어졌을지 몰라도 천주교를 극악한 배척해야 하는 존재로 여겼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때문에 그들의 묘지명을 쓰지 않은 데에는 그들이 단순히 유학의 나라에서 옹호조차 받을 수도 없는 천주교인이었기 때문이었다기 보다는 다른 까닭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 


우선 묘지명이 없는 세 사람의 공통적인 특징은 그들의 죽음은 -이벽의 경우는 여전히 갑론을박이 있긴 하지만- 정약용과 확실히 관련되어서가 아니라 그들 스스로 천주교를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결심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천주교를 함부로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는 당시 1820-30년대 현실 상황도 고려를 해야 한다. 신유박해 이래로 겨우 한숨 돌렸으나 분위기는 여전히 흉흉했고, 무엇보다 1839년에 기해박해가 결국 터지니 얼마나 입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조마조마한 상황이었을까. 


또 배교했음에도 죽임을 당한 매형 이승훈의 묘지명을 쓰지 않은 것은 두 가지로 추측해볼 수 있다. 


첫째로 이승훈의 배교는 '거짓'이었고 정약용은 그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특별히 더 혐의를 잡을 만한 꼬투리가 없는 자신의 형 정약전과 선배 오석충은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했으나 이미 누구에게나 서학의 우두머리 중 하나로 알려져 있던 자신의 매형 이승훈에 대해서는 그의 배교가 진심이건 아니건 냉정하게 버릴 카드라고 생각해서 변론하지 않았다는 추측이다. 


두 번째는 두 사람의 마지막이 너무 안 좋았다. 추국에 들어가니까 그부터 먼저 지목하면서 알아서 여러 천주교인 탄압에 앞장서는 정약용의 모습을 보고 이승훈은 분노하며 "내가 다른 사람들 세례 준 건 비밀로 해도 너를 직접 세례 준 거는 밝혀야겠다! 천주교인 100명 잡아들이는 것보다 정약용 1명을 죽이는 것이 낫다."라고 저주를 퍼부었으니 말이다. 


진실은 알 수 없으나 최초의 세례자 이승훈 베드로는 그렇게 종교계에서도 학계에서도 그 어디에서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그가 묘지명을 써준 정약전, 이가환, 권철신, 이기양, 오석충의 공통적인 특징은 우선 정약전은 따로 놓고 보더라도 나머지 네 사람은 모두 남인-신서파(아니 어쩌면 채제공 측 사람들일 수도)계의 거목들이자 대선배들이었다. 정약용은 이들의 죽음은 이들이 한때 천주교에 빠졌던 자신과 정치적 입장이 같았다는 이유로 천주교인으로 억울하게 몰려 죽임을 당한 것, 다시 말해 '사화'를 당한 거라고 주장하고 싶었던 것이다. 


특히 이 묘지명에서 주목할 부분은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핵심은 노론 벽파가 아니라 남인 내 공서파였던 목만중, 이기경, 홍낙안 등이었다는 걸 정약용이 계속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당시 남인 내에서 정치적으로 상당히 복잡한 갈등이 있었던 것 같고 이는 결국 각자의 학연 지연 혼맥의 네트워크로 인해 신서파와 공서파로 나뉘게 된 모양이다. 여기 이대목은 앞으로의 공부를 통해 생각이 달라지게 될지 아닐지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지금까지 내가 느낀 바로는 그렇다. 


참고로 정약전, 이가환, 권철신, 이기양은 놀랍게도 공서파의 거두였던 안정복이 권철신에게 보낸 편지에 적힌 "남인 내부에 서학을 굉장히 열심히 신봉하는 무리가 있다던데-" 하며 거론한 이름들이며 오석충은 권일신의 아들이자 권철신의 양자인 복자 권상문의 장인이라는 점도 매우 흥미로운 지점이다. 이것이 과연 우연의 일치일까? 이 역시 더 많은 공부가 필요한 부분이니 개인적인 생각은 여기까지 서술해야겠다. 


아무튼 정약용 스스로 밝히길 이들은 성호학파 신서파 계보의 거목들로 천상 유학자이며 천주교인도 아닌데 천주교인으로 몰려 죽임을 당해 억울하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 묘지명을 썼다고는 하는데 사실은 그들이 정말 천주교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반역죄에 해당하는 천주교인으로 낙인 되는 순간 정약용 자신의 학문 계보의 정통성도 그렇고 이들의 학문과 거목으로서의 행적이 왜곡될 것이 염려되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사화를 당한 것'이라는 당대인들이 한 번에 납득할 수 있는 표현을 통해 이들의 명예를 지켜주려고 했던 걸까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실제로 대선배인 네 사람들이 '이단'이라는 오해를 받고 있으면 이들의 학문을 계승하고 있는 정약용의 학문도 의심받게 되고 이는 학자에게는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을 위한 묘지명을 남기는 것은 상당히 유의미하고 필요성이 있으며 자찬묘지명을 쓰는 것과 맥락이 통한다.



도대체 왜 일련의 사건이 일어난 걸까, 왜 하필 조선의 천주교는 그의 집안에서 시작되어야 했을까? 하느님은 왜 그의 우인 이벽을 복음의 씨앗으로 선택했던 것일까? 그의 사촌 윤지충과 삼형 정약종은 왜 죽어야 했을까? 자신의 사랑하는 가족, 지인, 친구들은 왜 그가 한때 천주교에 관심을 가졌다는 이유로, 단순히 그와 연관된 사람들이라는 이유로 고통받아야 했을까? 자신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죽고 다쳤는데 비극을 부른 그는 그리로부터 30여 년이 흐른 예순이 되도록 왜 여태껏 살아있는 것일까?


그에게는 너무나도 미운 하늘이었을 텐데 그는 그럼에도 저 하늘이 자신에게 던지는 지상의 명령,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 돌아보겠다고 말한다. 그 하늘이 유학에서 말하는 하늘인지 천주교에서 말하는 천주님인지 그건 알 수 없다. 하지만 정약용의 사상에서 '천(하늘)'이란 인격천에 해당하니 어쩌면 은밀하게 '하느님'을 지칭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 고백을 토해내기까지 겪었을 그의 고통을 이해하니까 눈물이 났다. 


그는 역사에 이름을 남긴 한 시대의 위대한 학자라고만 하기에 그 인생사를 보면 '어우, 아무리 시대의 획을 그은 역사적 인물이 된다고 해도 저런 인생은 살고 싶지 않은데...?' 할만한 굴곡진 삶을 살았다. 마치 위대한 학문적 업적은 그의 비극적 운명과 맞바꾼 보상으로 느껴질 만큼 파멸적인 인생이다. 아마 평범한 사람이라면 저 상황에서 자신을 안 잃는 게 이상하다. 


그런데 그는 그럼에도 남은 생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자신의 묘지명을 스스로 쓰면서 고백하고 있다. 그래서 더욱 눈물이 났다. 어떻게 이렇게 자신의 삶을 긍정하고 사랑할 수 있을까? 자신으로 태어났기에 그는 자신을 사랑했던 화목한 가족들과 -갈리기는 했어도- 성호학파의 친구들, 선후배와 지인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학문을 집대성할 마지막 한 조각인 천주교도 만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 모든 일을 겪고도 자신의 삶을 사랑한다고 앞으로도 최선을 다해 살아나갈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는 자찬묘지명을 완성하고 스스로를 온전하게 용서할 수 있었을까?

윤지충의 죽음도 자신 때문이 아니라 그의 당당한 선택이었음을 받아들였을까?

부디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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