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ncy a pint mate?
펍 (pub), 퍼블릭 하우스 (public house)는 영국을 대표하는 문화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대폿집이 번역이 불가능한 것처럼, 펍은 펍이라고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원래 펍은 동네 사랑방 같은 곳이었다고 한다. 옛날부터 영국은 심심한 동네 그 자체였었다 (사실은 지금도). 다른 나라에 비해서 서민들의 놀거리와 문화가 상대적으로 덜 발달했는데, 이를 달래 주던 곳이 펍이었다고 한다. 사실 우리에게 펍의 이미지는 술집이지만, 전통적인 펍은 서민들이 모이는 장소, 그 자체였다고 한다. 사람들이 모이니 식사도 팔고, 이야기하고 놀 수 있게 술도 팔고, 같이 즐길 수 있는 당구대, 다트 등의 게임도 할 수 있게 갖춰놓은 곳이다. 지금도 이런 간단한 게임을 할 수 있는 곳이 많다. 또한 숙박업도 겸하던 곳이 많아서 현지인이든 외지인이든 사람들이 모이는 곳, 그 자체가 펍이다 (지금도 지방엔 꽤 있다; 펍의 이름에 inn이나 tavern이 있는 곳들. 이름만 이어받고 숙박업은 더 이상 안 하는 경우도 많고).
영국인을 생각하면 뭔가 무뚝뚝한 모습의 이미지가 떠오르지만, 사실 영국인들은 이야기하는 것을 굉장히 좋아한다, 때로는 수다스럽기까지 하다. 먼저 다가와서 말을 하지 않을 뿐이다. 일단 친구가 되어 펍을 같이 가면, 정말 귀가 지칠 때까지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영국인들은 술을 그렇게 많이 마시지는 않는다 - 말을 많이 하느라 술 마실 틈이 없어서,,,,는 농담이고, 당연히 사람마다 다르지만 정말 한국식으로 죽을 정도로(?) 마시지는 않는다 (일반적으로). 무엇보다 덩치에 비해 술이 센 거 같지는 않다. 왠지 맥주 탭(tap)에 입을 대고 마실 것 같은 외모의 아저씨들도, 한두 잔에 취해서 엄청 큰 목소리로 수다를 떠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술에 취해 그냥 바닥에 취객이 뻗어버려서 가끔 앰뷸런스가 출동하기도 한다 - 취객 상대를 자주 해본 경험이 구급 요원의 심드렁한 태도에 잘 드러난다. 애주가인 나와 미끼씨는 그 모습을 보고 썩소로 비웃어준다, 흥 덩치는 산만하면서. 약골들.
사실 런던 같은 대도시에는 전통적인 펍이 많이 사라지고 있다 한다. 젊은 사람들은 약간 후진(?) 그런 곳 보단 세련된 바나 신나는 클럽을 선호하지, 뭔가 아재스러운 펍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조금 외곽이나 시골, 또는 한적한 주택가로 가야 제대로 된 펍을 찾을 수 있다. 엥? 주택가라고? 앞서 말했듯이 펍은 그냥 동네 사람들 놀이터였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정말 뜬금없는 곳에 자그마한 펍이 있고, 무료한 저녁에 와서들 앉아서 있다. 초로의 부부가 와서 각자 신문 보고 책 보면서 한 마디 이야기 없이 술 마시고 가는, 그런 곳이 펍이다. 예로부터 서민층이 주 고객층인 펍이라, 펍의 이름은 굉장히 간단하고 기억하기 좋은 경우가 많다. 옛날엔 서민층은 문맹률이 많았기 때문에, 유명한 사람의 얼굴이나 동물 등의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상징을 많이 썼고, 그 상징이 그대로 이름이 된 경우가 많다고 한다. 예를 든다면 이런 식이다.
"헤이, 오늘 한잔 어때? 저녁에 빨간 사자 집에서 보자고" - 그대로 레드 라이온(Red Lion)이 이름이 됨.
"아냐 오늘은 그 남작(Baron, 남작 얼굴이 그려져 있는) 펍으로 가자구" - 후에 남작의 얼굴 (Baron's Head)가 이름이 됨.
그래서 사실은 펍의 간판과 이름은 뭔가 엄청 촌스럽고 이상한 것들이 많다. 또한 오래된 역사와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펍의 존재 자체가 이야깃거리가 되는 것이다. 펍 문화에 관한 자료와 책만 봐도 재미있다. (개인적으로 조용준 작가님의 '펍, 영국의 스토리를 마시다' - 이 책을 추천한다.)
영국에 머물게 된다면, 펍을 꼭 가보라고 추천하고 싶다. 큰 길가에 있는 프랜차이즈 펍 보다는, 뭔가 특색 있는 로컬 펍을 권하고 싶다. 어떻게 아느냐고? 검색하면 다 나옵니다. 펍은 크게 특정 양조 회사의 술을 공급받아서 파는 tied house와 직접 만든 (crafted) 맥주나 여러 양조 회사의 술을 파는 free house 가 있다. 어느 쪽이 좋다고는 할 수 없다. 전자의 경우엔 아무래도 술의 품질이 일정하고 (간혹 술이 상해있는 경우가 있다. 바꿔달라고 하면 바꿔준다. 소심한 나는 상한듯한 기네스를 그냥 다 마셔서, 친구가 웃으면서 바텐더에게 말해서 바꿔준 적도 있다.), 후자의 경우에는 직접 만든 자체 맥주를 맛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Free house라고 양조 회사 술이 없는 것도 아니고, tied house라고 해서 꼭 그 회사의 술만 있는 건 아니므로 사실 큰 의미는 없다. 그냥 무슨 뜻인지 알고 가면 재미있으니까.
술은 바에 가서 원하는 술을 파인트(pint)나 하프(half-pint) 주문하면 탭(tap)에서 바로 쓔욱 뽑아준다. 뭐라고 하면 되냐고? 영어 못해도 상관없다. tap을 가리키면서 '디스 원 파인트 플리즈' 만 해도 충분하다. (조금 한가한 시간대에는 맛보고 싶다고 하면 조금씩 뽑아준다. 직접 양조한 맥주거나 처음 보는 맥주는 맛을 보고 주문하는 것도 좋다). 사실 바쁠 때는 영어가 문제가 아니다. 주문하기가 굉장히 힘들다. 그렇게 줄을 서는 영국인데, 펍은 보통 난장판이다. 특히 금요일 저녁에 가면 너도나도 주문하고자 해서 바텐더도 정신없다. 주문받으랴, 술 받으랴, 계산해주랴.. 눈치껏 잘 보고 목소리 크게 주문하면 된다. 특히 스포츠 시합 중이거나, 라이브 공연 중이면 그야말로 난장판이다. 그래서 술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냥 아예 몇 잔 주문하는 게 나을 수도 있다. 그렇게 술을 받아서는 아무 곳이나 먹어도 된다. 보통 밖에서도 마실 수 있는데, 펍의 영역이라고 표시가 되어있고, 넘어가면 보통 보안 요원 아저씨들이 주의를 준다. 실내 흡연은 금지되어 있으므로, 흡연자는 밖에서 마시면 편하다. 안주는 보통 안 시키지만, 시키면 테이블 번호를 말해주면 가져다준다 (바쁠 때엔 안주 주문 안 받는 펍도 많다. 한국 사람이 보기엔 그런 생각이 든다; 장사에 뜻이 없나?) 술을 안 마셔도 상관없다. 다른 음료도 많고. 무알콜 칵테일도 판다. 와인, 위스키 다 판다. 계절 한정으로 나오는 술도 꽤 있다.
유럽이나 미국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 중에, 아시안들은 너무 낯을 가린다(shy)라고들 한다. 특히 파티에서. 뭐, 어느 정도 동의하지만... 사실 무엇보다 일단 언어가 상대적으로 부족한 점이 제일 크고, 개인적으로는 서서 술을 먹는 분위기에 익숙하지 않다는 것도 큰 이유라고 생각한다. 실제 갈라 (gala)나 파티에 가면, 서양인들은 다 서서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신지만, 보통 벽 쪽에 있는 소파나 의자 등엔 아시안들이 앉아 있다. 나도 아직도 어색한 것은 사실이지만 (무엇보다 다리가 아프다!), 서서 이야기하면서 술을 마시는 것도 나름 괜찮다. 특히 좋은 날씨에 밖에서 마시면 기분도 좋다. 아무래도 서서 먹다 보면 좀 덜먹게 되는 좋은 효과도 있다.
보통 펍은 한국문화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리 편한 장소는 아닌 것 같다. 좁고 시끄러운 데다가, 오래된 펍들은 사실 좀 더럽다 (특히 화장실). 게다가 서서 술을 마셔야 하고, 조금 마실라치면 라스트 오더(last order) 종을 땡땡 치면서 나가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11시).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에 들르게 된다면 펍을 꼭 가보라고 권하고 싶다. 여행을 즐기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여행지의 문화를 즐겨보는 것은 빼놓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펍은 영국을 느끼기 좋은 여러 가지 요소를 다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바깥바람을 쐬면서 천천히 마시는 술 맛은 - 아, 이래서 한량들이 행복하구나 -라는 생각이 들게 할 정도로 기분 좋은 경험이다.
사실 장소가 어느 곳이든, 어떤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지 않을까나. 술에 관한 이야기를 쓰다 보니, 한국에 있는 친구들이 괜히 그립다. 좋아하는 펍에 가서 같이 웃고 떠들 수 있다면 참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