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를 그만두고 처음으로 나에 대해 설명할 수식어를 잃어버렸다. 30년 평생 나는 누군가의 딸이자 어딘가의 학생이었고 또 직원이었는데 마치 공기의 소중함을 모르듯 나는 그것들이 나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몰랐던 것이다.
백수가 되어 숨 고르기를 하는 동안 집 근처 단골 술집에서 알바를 했다. 월급보다 거기 직원들이랑 같이 술 마시는데 쓰는 돈이 더 많았지만 처음으로 주어진 자유 시간들이 숨이 찰 만큼 재미있었다. 받아 놓은 퇴직금은 두둑했고 그래서 창업을 할까 아예 작정하고 글을 쓰기 시작할까 여유롭게 고민을 하던 시기였다. 단 한 가지 거슬리던 건 나를 보는 가게 손님들의 시선이었다. 아니, 실제로는 나를 ‘보는’ 사람이 없었다. 나를 대하는 사람들의 눈빛은 무관심하다 못해 무례하기까지 했다. 그 술집에서 나는 단지 주문받고 서빙하는 아르바이트생일 뿐, 나의 이름은 뭔지, 내가 무슨 일을 하던 사람이고 앞으로 무슨 일을 하고 싶은지 궁금해하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따금 나는 그들의 “나는 예의 바른 사람이라 당신을 예의 있게 대합니다.”는 태도를 마주할 때마다 역한 느낌마저 받았다. “저기요, 저도 4년제 대학 나와서 좋은 직장에서 월급 잘 받다가 지금은 그저 잠깐 쉬고 있는 거거든요? 저는 당신만큼 똑똑하고 돈도 잘 벌던 사람이에요. 당신이 나누는 대화에 대해서 당신보다 더 잘 알고 있어요.” 라고 외치고 싶은, 나도 이해할 수 없는 욕구가 종종 올라왔다.
그것은 단순히 내가 어딘가 소속되어 일하는 직원 나부랭이여서 뿐만은 아니었다. 지난 회사에서 일할 때도 나는 일개 직원이었으나 중요한 건 ‘대기업’의 직원이라는 사실이었다. 거래처든 고객이든 나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은 내가 중요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내가 소속되어 있던 회사가 중요했기 때문이라는 걸 나는 나를 이루는 모든 수식어를 잃은 후에야 잔인하게 깨달았다. 술집에서 아르바이트하는 나는 그야말로 아무도 아니었다. 대기업의 톱니바퀴라는 표현은 양반이었다. 그 톱니바퀴는 빼고 끼우는데 절차와 돈이라도 들지, 일개 식당의 아르바이트생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먼지 같은 존재였다.
재밌는 건 그 술집에서 일하는 쉐프들에게는 사람들이 의외로 아주 공손하다는 사실이었다. 쉐프가 경력과 열정과 실력을 갖춘 훌륭한 전문가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같은 가게에서 일하더라도 쉐프는 전문직으로 우대받고 홀 서빙하는 사람은 딱히 인정받지 못한다는 게 내게 재미있는 포인트였다. 사람들한테는 자신에게 이득을 줄 만한 사람에게 아부하는 특성이 있다. 쉐프가 어떤 손님들이 마음에 든다면 안주 하나쯤 더 만들어 줄 수도 있겠지만 그 정도 권력은 홀 서빙하는 아르바이트생에게도 있다. 나도 마음에 드는 손님에게 비싼 술 한 잔 정도 서비스 할 수 있었을 거고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 사람들이 타인을 존중하는 기준은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과연 진짜 사람들이 쉐프들을 진심으로 존경하는 걸까, 하는 데는 여전히 회의감이 들었다. 오히려 쉐프 중 한 명은 내가 여러 기회 중에 선택에 선택을 거듭해 이 자리에 온 것에 대해 대단하다고 얘기했다. 자신은 이런저런 이유로 대학도 가지 못했고 그래서 쉐프가 되는 것 외에 인생의 선택지가 없었노라고 고백하며 말이다.
이후 좋은 기회가 생겨 고향에 내려와 남은 퇴직금으로 카페를 차렸다. 그때부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단 몇 천만 원만 있어도 차릴 수 있는 손바닥 만한 작은 카페일지라도 내가 카페의 사장이라고 할 때마다 나에게 고개를 굽신거리는 사람들이 생겼다. 물론 가끔 무례한 손님들은 있었지만 그런 사람들도 내가 ‘사장’이라는 걸 알게 되면 그들의 무례함을 감추려고 노력을 했다. 몇 개월 전 아르바이트생이던 나와 카페 사장인 나는 다를 게 하나도 없었는데 사람들의 변화는 놀라울 정도였다.
나에게도 변화가 생겼다. 그즈음부터 사람들의 나이와 직업에 대해 묻지 않게 되었다.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나만의 질문을 하나씩 만들어갔다. 상대방의 직업이 궁금하진 않았지만 그 사람이 본인의 직업을 좋아하는지는 항상 궁금했다. 지금 직업이 별로라면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지, 쉬는 시간에 시간을 보내기 위해 주로 하는 건 뭔지, 어떤 책과 영화를 보는지, 무엇을 먹고 마시는 게 행복한 사람인지, 물어볼 건 끝도 없었다. 그런 게 진짜 그 사람을 이루는 거라는 생각을 했다.
지금 나는 공인중개사 일을 한다. 매년 공인중개사 시험 응시자는 수능 응시자의 절반이 넘고 친척 중에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가진 사람이 한 사람씩은 있을 정도로 공인중개사는 흔하디 흔한 직업이다. (아, 직업의 귀천은 그 개수로 정해지는 것일까?) 취미 모임에 나가다 보면 내 직업에 대해 이야기하게 될 때가 종종 있는데, 그럴 때마다 마주치는 건 아르바이트생보다는 덜 무관심하지만 카페 사장보다는 확연히 떨어지는 존경심 같은 거다. 사실상 지금의 나는 카페 사장을 할 때보다 일은 더 적게 하고 돈을 더 잘 버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직업 소개 끝에 꼭 덧붙이는 말이 있다. “해운대 센텀에서 사무실 위주로 중개합니다.” 내가 일하는 지역은 다른 동네보다 훨씬 비싼 동네이며, 네가 흔히 마주치던 원룸 중개인들과 나는 다르다는 걸 강조하고 싶은 속마음이 반짝거린다. 나의 얄팍하고 세속적인 마음에 스스로 매번 찔리면서도 나는 상대방이 나를 조금이라도 더 존중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그 사람이 나에 대해 가지는 인상은 정말 한 찰나에 형성되기 때문에, 지금을 놓치면 안 된다는 간절함까지 가지고서.
단순한 논리로 진정한 나를 궁금해하지조차 않는 사람은 안 보면 되지, 생각하기가 참 쉽지 않다. 얄팍하고 세속적인 계산으로 나오는 결론일지라도 나는 존중받고 또 사랑받고 싶다. 나는 오늘도 “네가 나에 대해 뭘 알아...” 중얼거리면서도 그 사람 손을 잡고 내 잘난 점에 대해 침을 튀기며 말을 건다. “나는 이런 사람인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