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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윤 Mar 26. 2024

사랑하는 가여운 우리 엄마

애증의 당신

애증이라 하면 당연히 제일 먼저 생각나는 사람은 엄마일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엄마에 대한 글을 쓰고 싶지 않았다. 지겹잖아. 엄마 이야기 좀 그만 하고 싶어. 무슨 말로 시작하든 ‘사랑하는 가여운 우리 엄마’로 끝이 날 것 같았다. 나만 재밌는 글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며칠 전 타이밍 좋게 일이 터졌고, 나는 엄마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사나운 애착>을 읽으며 우리 엄마가 그의 엄마와 똑닮았다고 생각했던 부분이 하필 엄마가 수어년을 바쳐 나를 대학까지 보내놓고 내가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점’ 때문에 화를 내는 부분이었다. 엄마는 이따금 대학을 나온 아빠와 동생, 나를 묶어 어쩜 그렇게 셋이 한 편이냐고, 잘난척 하지 말라고, 어쩜 감히 나를 가르치려드냐고 소리를 지르곤 했다. 셋이서 같이 하는 이야기이면 이유가 있겠지, 생각이 끼어들 틈은 없었다. 엄마는 이유보다는 항상 공감과 이해가 필요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밥상 앞에는 항상 술이 있었다.


며칠 전 저녁, 막걸리를 반주 삼아 밥을 먹는데 엄마가 문득 아빠가 결혼 전 데이트할 때 술을 유독 못 먹게 한 게 참 억울했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엄마가 취해서 기분 좋아지는 걸 어쩜 그렇게 가만두지 못하냐고 아빠를 탓했다. 당시 엄마 아빠 나이 20대 중반이었고 첫 데이트 상대가 취하면 당황스러웠겠지 싶었지만 엄마는 연신 짜증을 섞어 불평을 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아빠는 당신은 옛날을 떠올리면 좋은 기억이 더 많이 떠오르는데 당신은 왜 그러냐, 엄마를 타일렀다. 나도 그래, 좋은 기억을 더 많이 하면 좋지, 그리고 어차피 술 그거 뭐가 좋다고 일찍부터 마셔, 하고 아빠를 거들었다. 엄마는 입이 댓발 나온 걸 겨우 숨겼지만 이어서 동생 부부 얘기가 나오자 또 특유의 부정적인 말투로 우리의 말 끝을 잡기 시작했다. 애도 낳고 연구도 하느라 힘들텐데 참 잘 사는 것 같아 장하다, 보기 좋다는 내 말 끝에 엄마는 걔네도 힘든데, 네 동생 성격에 말을 못 하는 것 뿐이라는 것이다. 아니, 뭐 안 힘든 육아가 어디있겠어, 그 정도면 잘 지내는 거지, 또 뭐 참을만 하니까 버티고 그러겠지, 또 동생 걔가 아예 안 좋으면 우리 전화도 잘 안 받잖아, 근데 요 몇 주는 전화도 많이 오고 또 잘 받고, 내가 볼 땐 별 문제 없어 보이는데, 하고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았더니 엄마가 화를 꾹꾹 눌러 담은 목소리로 ”너 오늘 말이 참 많다.“ 하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왠지 모르게 냉냉해진 공기 속에 나는 뻣뻣하게 일어나 먹은 식기를 대강 정리하고 방에 들어와 문을 닫아버렸다. 저 공기 속에 있는 게 싫었다. 곧 이어 아빠도 방으로 들어가는 소리가 들리고 나자 문 너머로 엄마가 코를 훌쩍거리는 소리가 새어 들어왔다. 엄마가 기분이 많이 상했구나. 울고야 말았구나.


엄마가 평생 이겨내지 못하는 그 부정적인 감정은 온통 억울함이라는 감정에서 비롯됐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더 공부하고 싶었던 엄마, 그랬다면 훌륭하고 똑똑한 사람이 되었을 엄마, 그 엄마를 묶어둔 건 엄마의 엄마이자 오빠였고, 또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엄마를 꼬셔내어 주부로 만들고 또 엄마로 만든 게 아빠였으므로, 엄마는 온통 본인의 인생을 가로막은 것들이 가족들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태어났고, 동생이 태어났고… 엄마가 할 수 있었던 일은 이 어린 것들을 자신보다 똑똑한 사람이 되도록 만드는 것 밖에 없었는데 웬걸 똑똑해진 딸들은 머리가 굵어졌다며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게 행동들을 하는 것이다.


엄마는 내가 볼 때 확실한 우울증에 더 확실한 알코올 중독이다. 우리 집엔 항상 소주가 두 박스(한 박스에 소주가 20병 씩 들어가는 것을 아는가? 우리 집의 소주 두 박스 중 한 박스는 새 것이고 한 박스는 빈 병을 모아두는 용이다.) 씩 있는데 그걸 엄마가 매일 반 병에서 한 병씩 마신다. 술을 마실 때 엄마는 반은 아주 즐거워지고 반은 아주 어두워지는데 하필 그 날, 엄마가 어두워졌을 때, 나와 아빠가 엄마는 왜 그렇게 부정적이느냐고 놀려먹은 것-으로 오해하게 한 것이다.


아빠와 나는 안방 밖에서 엄마 왜 저러냐, 하고 한숨을 내쉬었지만 다행히 다음 날의 엄마는 웃으면서 출근했다. 하지만 과연 다행일까? 과음하고 욱 해서 화내고 울었다가 다음 날 괜찮은 척 하는 엄마는 정말 다행인 걸까? 속상한 우리 엄마, 좋았던 기억보다 힘든 기억이 훨씬 많은 우리 엄마, 본인의 인생을 선택할 수 없어서 내내 억울한 우리 엄마는 언젠가 결국 아빠와 결혼을 결심한 사람이 엄마 자신이라는 걸 받아드리게 될까? 우리가 대학을 가고 똑똑해진 건 엄마를 위해서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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