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용성, 전복들, 그들이 기획한의 작업들
2019년에 천용성의 [김일성이 죽던 해]를 내고 '프로듀서의 일'이라는 제목으로 총 네 편에 걸친 긴 작업기를 썼다. 반향이 있을 만큼 많은 분들이 읽어주시진 않았지만 이후로 만나는 음악가 중 간혹 '잘 보았다'라거나 '도움이 되었다'라는 피드백을 주시는 분도 있었다. 필요한 사람들에게 작게나마 쓰임이 있었다면 다행이라 생각한다. https://brunch.co.kr/@danpyunsun/53
본격적으로 작업기를 남기기 시작한 건 단편선과 선원들을 할 때였다. 2014년 첫 앨범 [동물]을 내고선 강진원 매니저를 시작으로 멤버마다 작업기를 썼다. 작업기를 쓰게 된 것은 다른 이의 작업기를 읽고서 나와 우리 역시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일렉트릭 뮤즈의 김민규 대표와 김목인이 쓴 작업기도 함께 링크해둔다. https://electricmuse.tistory.com/67
작업 하나하나 작업기를 낼 수 있으면 참 좋겠으나 글을 쓴다는 건 어쩄건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2020년은 작업만 하는데도 상당히 빠듯한 한 해였다. 종일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날은 한 달에 하루 이틀 정도 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자의건 타의건 일이 많다는 것은 삶의 좋은 것들을 많이 앗아간다. 나 역시 음악에 많은 것을 빼았겼다. (지나치게 후회하진 않는다.) 차분하게 무언가를 쓸 시간이 없어 완성되지 못했거나 아예 시작조차 못한 작업기가 쌓여 마음의 부채로 남았다. 글이라는 것이 대개 그렇듯, 이 글 역시 기본적으로는 내 부채를 탕감하기 위해 시작한 글이다.
2020년 동안 5장의 싱글과 1장의 앨범을 프로듀싱했다. 1장의 앨범이 발매되는 것을 서포트했다. 보다 세세한 작업내역에 대해서는 다음의 링크를 참조. http://osoriworks.kr/
오소리웍스 2020년 발표한 작업들은 다음의 플레이리스트에서 한 번에 즐길 수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u70qZgi2nqc&list=PLgcN5wcLM5g1pzjeMITdeQEhEVqOK9uDu
작업 순서대로 쓴다.
용성이 [김일성이 죽던 해]를 낸 것이 2019년 6월이었다. 쇼케이스까지 마치고, 우리는 한동안 뜸했다. 의도가 있었기 보다는 당시 다니던 직장에서 여름 가을에 일이 지나치게 몰려 정신이 없었다. 용성은 그 사이에 음악가 이권형이 만들던 컴필레이션 [모두의 동요]에 들어갈 신곡을 작업하고 있었다.
숨을 조금 돌리고 간만에 만났다. 용성에게 물었다. 용성, 이번 겨울에 뭘 더 낼까 말까. 더 내고 싶어요. 그래요, 냅시다. [김일성이 죽던 헤]를 내기 전에 용성이 혼자 만든 demo를 뒤적여보았다. '중학생'이 있었다. '중학생'은 좋은 가사와 선율을 가지고 있는 곡이었는데 demo는 구성적으로 조금 방만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김일성이 죽던 해]에는 수록하지 않았는데 간만에 들어보니 해봄직 할 것만 같았다. 지난 작업을 함께하며, 내 마음 가는대로 작업해도 용성이 믿어줄 것이란 확신이 생겼기 때문이다.
긴 호흡의 곡인 탓에 음악적으로나 서사적으로나 늘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강렬한 드라마를 가지고 있는 곡은 아니지만 잔잔하면 잔잔한대로, 소박하면 소박한 대로 그 나름의 드라마가 필요했다. 없는 부분은 만들어 넣고 있는 부분은 들어냈다.
내게는 이 곡이 (문자 그대로의) 중학생이 부르는 노래라기 보다는 90년대라는 시공간에서 10대를 보낸 어떤 사람들이 지난 일들을 회상하며 부르는 노래처럼 느껴졌다. 용성에게 물어보니 화자는 여성으로 설정되어 있다 했다. 꼭 그 때문은 아니지만, 여성 싱어가 곡을 열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체적으로는, 코나의 오래된 노래인 '우리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답다'처럼 시작하고 싶었다. 오랜만에 주연 님에게 연락을 드렸다. 2000년대와 2010년대를 걸치는 시기에 인디음악을 좋아하던 팬들에게 앳된 목소리로 기억되는 주연 님은 이제 두 아이의 엄마다. 스튜디오에서 주연 님의 목소리를 담아내던 그 짧은 순간이 이상하게 계속 기억을 맴돌았다.
편곡에서 가장 고민한 부분은 chorus 파트, 그러니까 '창밖에 떠드는 아이들 소리 / 이제는 알 것 같아요 / 세상의 예쁜 것들은 / 모두가 거짓인가요'라는 가사가 등장하는 대목이다. (이 가사는 가장 마지막 반복에서 '세상의 예쁜 것들은 모두 다 거짓이에요'라는 가사로 변주된다.) demo에서는 선율과 코드 정도만 간단히 제시되어 있었다. chorus 파트에서 사운드의 규모를 키우기로 했다. 높거나 커진다기 보다는 '넓어진다'는 인상을 주기로 했다. chorus 파트 전까지 통상적인 팝 발라드의 문법을 따르고 있던 드럼은, 이 파트에서만 cymbal과 ride, tom 등을 오가며 복잡하고 웅장한 리듬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곡의 전체적인 인상이 '청명함'을 표현하는데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디스토션 등을 통해 거칠게 만들지는 않았다. 약간의 트릭이지만 어떤 순간부터는 첫 박을 계속 반 박 씩 당겨서 청자들이 박자를 세기 어렵게, 일부러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높고 파란 하늘, 넓고 고요한 운동장, 입김이 나오는 추운 날씨, 혼자 천천히 교문으로 걸어나가는 작고 어린 중학생의 모습 같은 것들이 떠올랐으면 했다.
제목인 '분더바'는 훌륭해! 근사해! 라는 뜻의 독일어 Wunderbar를 한글로 표기한 것이자 곡의 첫 가사인 "분하지, 더럽지, 바뀌는 건 하나 없지"의 줄임말이다. (생각해보니 3행시다.)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인해 밀려난 연희동의 카페 '분더바'와 서촌 '궁중족발', 그리고 보다 근본적으로는 '용역'이라는 형태로 깡패를 동원하는 공적 / 사적인 권력에 대한 노래라는 점은 이미 소개글을 통해 알려졌다. 이 글에서는 음악을 만든 과정에 대해 다루고자 한다.
[김일성이 죽던 해]를 발표하기 전 이미 만들어진 노래다. (용성은 음반을 준비하며 몇 년 만에 선보이는 첫 공연을 궁중족발에서 가졌다. 이 노래는 그 공연에서 처음 불렸다.) 그러나 노래가 만들어졌을 때는 이미 [김일성이 죽던 해]에 들어갈 모든 노래의 선곡이 끝난 다음이었기에 '분더바'의 레코딩은 고려되지 않았다.
[김일성이 죽던 해]를 발표하고 쇼케이스를 하는 날이었다. 고맙게도 유통사인 포크라노스의 직원들이 공연장을 찾아주었다. 아직은 준비된 노래가 몇 없던 용성은 그 날 앵콜곡으로 '분더바'를 불렀다. 공연이 끝나고 나가는 손님들에게 인사를 드릴 때, 포크라노스의 맹선호 팀장(지금은 부장이다.)이 "분더바 좋던데요? 다음에 내봐도 좋을 것 같아요."라고 바람을 잡았다. 그 말에 또 홀딱 넘어간 나와 용성은 '중학생'과의 커플링곡으로 '분더바'를 골랐다.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명확한 곡이었던 탓에 굳이 과한 편곡을 거치지 않았다. 다만 몇 가지 장치를 넣었다. 아이러닉한 느낌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 포크기타와 텔레캐스터를 동일한 스트로크로 연주해 조금 과하다 싶은 찰랑거림을 만들어냈다. (지금 다시 들어보니 살짝 과한 컨셉이었던 것 같다.) 짧은 곡이지만 verse가 세 번 반복되니 양념을 조금 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심플한 기타 리프를 얹었다. '천용성의 프로듀서'로서 개인적으로 얻은 소득은, 마지막 verse에서 한 옥타브 높은 유니즌 멜로디로 용성이 뭔가를 외치듯 불러보게 했다는 것이었다. 외치는 게 생각보다 매력이 있네! '분더바'는 그렇게 완성되어 갔다.
포크기타를 오래 쳐왔다. 하지만 결코 기타를 잘 친다고 할 수 없다. 일단 누군가에게 배운 적이 없어 기본기가 전혀 없다. 크로매틱 스케일 연습 같은, 일렉트릭 기타 입문자들은 모두 연습하는 가장 기초적인 연습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다만 고등학교 시절 집 책장에 꽂혀 있던 '이정선 기타교실'과 '포크송 대백과' 같은 책들을 보며 더듬더듬 치기 시작했을 뿐이다.
때문에 일렉트릭 기타를 쳐본 경험이 별로 없었다. 친구에게 15년 쯤 전에 매우 저렴한 가격(10만 원 이하)에 산 일렉트릭 기타가 하나 있었지만 앰프 하나 장만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 주제에 2020년 들어올 떄쯤 일펜(Fender Japan에서 나오는 모델) 텔레캐스터를 하나 장만했다. 호기롭게 [중학생 / 분더바] 싱글의 일렉트릭 기타 연주도 맡아 보겠다고 했다. 제작비를 줄이려는 마음 때문이기도 했지만 왠지 근거 없는 자신감이 넘쳐나고 있었다.
'분더바'는 무리 없이 완주했다. 문제는 '중학생'이었다. 7분에 이르는 길고 방대한 구성의 곡을 연주하는 건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후편집을 통해 어떻게든 커버칠 수 있는 수준으로 연주했다. 그런데 기타 솔로는 정말 답이 없었다. 퍼즈톤의 기타로 살짝 사이키델릭한 무드를 연출하고 싶었는데, 거의 반 프로(3시간 반의 반절 가량)을 시도했는데도 전혀 원하는 느낌이 안 나왔다. 멜로디를 모두 짜서 연습까지 해갔지만 연주감이 완전하게 달랐다. 생각해보면 당연했다. 집에 앰프 하나 없는 사람이 포크기타 연습하듯이 솔로 연습을 하니 될 리가 없던 것이다.
2시간이 다 되어가니 보다 못한 천학주(구로디지털단지 인근에서 머쉬룸 레코딩 스튜디오를 운영중인 사람. 오소리웍스의 주거래처다.)가 그냥 포기하라고 해서 포기했다. 결국 며칠 후 종훈(고등학생 시절 친구들과 결성한 밴드 그들이 기획한의 기타리스트)에게 '여기서 이렇게 되야해. 저기서 저렇게 되야해.'라는 식으로 부탁해 겨우 솔로 녹음을 마쳤다. 일렉트릭 기타는 인디팝 / 인디록의 핵심적인 사운드를 만들어내는 악기 중 하나다. 일렉트릭 기타와 기타 사운드 메이킹에 대한 경험이 부족하다는 건 프로듀서로서 큰 제약이었다. 2020년 내내 일렉트릭 기타만 녹음하면 자신이 없었다.
'대구의 기타팝 아나티스크'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전복들과 작업을 시작한 게 2019년 여름이니 천용성과 함께 가장 오랫동안 오소리웍스와 작업한 밴드라 할 수 있다. 함께 한 시간에 비해 2020년 연말까지를 기준으로 한 곡의 싱글 만이 나왔을 뿐이니 작업량이 작아보인다. 그건 다음의 이유 때문이다. 요약하자면,
전복들의 고창일이 단편선에게 전복들 첫 정규앨범의 프로듀싱을 제안 → 단편선이 수락 → 고창일이 demo를 공유 → 단편선이 체크 → 이런저런 커뮤니케이션 → demo 음원의 사운드가 지나치게 lo-fi해 의도된 것인지, 아니면 원래 레코딩 당시부터 source의 퀄리티가 이랬던 것인지 체크하기 위해 단편선이 대구 작업실로 내려가기로 함 → 대구에서 고창일과 단편선 접선 → 작업실로 이동 → 작업실 앞에 오니 엔지니어가 사색이 되어 뛰쳐나옴 → 지금까지 작업한 모든 파일이 날아갔다 함.
어쨌건 우연한 사고로 모든 작업이 날아가서 처음부터 다시 해야하는 상황이 생겼는데, 마침 베이스와 드럼도 공석인 상황이었다. (demo에 실린 것들은 전 멤버들이 연주했던 것.)
당장 정규 앨범을 처음부터 다시 만드는 것은 엄두가 나질 않았다. 일단 싱글로 방향을 선회하기로 했다. 처음부터 준비해서 천천히 내도 될테지만 밴드가 너무 오랫동안 작업물을 내놓지 않는 것도 별로니까.
처음 전복들의 음악을 좋아하게 된 것은 '원정이는 깔끔해'를 듣고 나서였다. 보기 드문, 인디록과 기타팝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음악이었다. 허술하면서도 감각적이었고, 어쩐지 굉장히 포근하게 느껴졌다. '원정이는 깔끔해'가 실린 3곡 짜리 싱글 [우주가 전복해]의 라이너노트를 쓴 음악평론가 김학선이 창일로부터 인용한 "기타 팝의 친절함, 쉬움, 사랑스러움을 좋아하고 모든 장르는 그래서 각자의 위치와 역할이 있다고 생각"한다는 말도 참 좋았다. "각자의 위치와 역할이 있다"라는 말이, 언더그라운드 / 서브 컬쳐 / 인디의 어떤 애티튜드를 사근사근하면서도 멋지게 표현해냈다고 생각했다.
'원정이는 깔끔해'를 포함해 전복들이 가진 대부분의 곡은 '저스트 기타팝'이라 불러도 좋을 곡들이었다. 그런데 'We are Here and Everywhere'는 다른 곡들과 달랐다. Arcade Fire의 'Wake Up'과 같은, 인디록 응원가 내지는 인디록 Chant스러운 인상이었다. (물론 많이 다르다 ,,, 그냥 인상이 그랬다!) 창일에게 물어보니 대구퀴어문화축제 10주년을 맞아 드링킹소년소녀합창단의 배들소, 안녕, 엘리사의 김현우, 마치킹스의 정성훈이 함께 만들어 헌정한 곡이라 했다. 프로듀서를 영입해 새로운 모습을 선보이는 싱글이라면, 곡도 조금은 다른 질감이면 좋겠다 생각했다. 'We are Here and Everywhere'로 정했다.
서울과 대구, 혹은 서울과 비-서울의 가장 큰 차이는 인프라다. 개인적으로, 로컬씬에 관심이 많기도 하고(서울도 하나의 로컬씬이다.) 한창 아티스트로 살 무렵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닌 탓에 친구도 여기저기 퍼져있다. 같이 이야기를 나눌 기회도 많았는데, 언급했듯, 가장 차이가 큰 부분은 인프라였다. 특히 대구와 부산은 서울에 비해 작지만 나름의 규모를 가진 로컬씬이 있었고, 활동하는 아티스트의 수도 적지 않았다. 문제는 스튜디오와 엔지니어였다. 밴드 음악, 특히 드럼을 레코딩할 스튜디오를 찾기가 어려웠다. 엔제니어도 마찬가지. 많지 않았고, 가능하더라도 프로듀서로서 의도한 소리, 캐릭터를 만들 수 있을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이는 내가 서울을 기반으로 작업하는 프로듀서라서 더욱 그런 부각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나도 전복들과 작업을 해본 적이 없던 상황에서, 비용이 들더라도 안전하게 가는 것이 낫다는 판단이었다. 한편으론 전복들도 서울에서 작업을 해본 경험이 없어, 새로운 환경을 경험하고픈 마음이 있었다. 주거래처인 머쉬룸 레코딩 스튜디오로 가기로, 전복들이 이틀 정도 올라오기로 했다.
베이스와 드럼은 전복들의 친구인 밴드 폴립의 안현우와 전성현이 연주하기로 했다. 둘은 레코딩을 해본 경험이 상대적으로 많아 큰 무리 없이 연주를 해냈다. (라이브 할 때만큼 심벌과 하이햇, 스네어를 '조지면' 믹싱 단계에서 애로가 있기 때문에 다이나믹 조절에 신경을 쓴 정도다.)
일렉트릭 기타와 보컬을 레코딩 할 때가 난관이었다. 창일과 기타리스트인 현우가 기타를 나누어 쳤는데 일단 라이브 때 쓰는 기타톤과 비슷하게 잡아보라 하니 리버브, 딜레이, 쉬머, 오버드라이브 등등등 ,,, 여하간 상당히 많은 종류의 이펙터가 걸렸다. 이펙터를 잘 쓰는 것은 기타리스트에겐 매우 중요한 덕목이며 특히 록 음악에선 사운드의 핵심이다. 그런 만큼 면밀하게 세팅해야 한다. 음식에 소금간을 하는 것과 비슷하게, 너무 많이 걸면 원 재료(연주)의 맛이 사라지고 그렇다고 너무 안 걸면 밍숭맹숭해진다. 걸어둔 모든 이펙터를 다시 풀고 조금씩 농도를 짙게 해보면서 가능한 원하는 것과 흡사한 지점을 찾아보았다. 대부분의 응원가는, 웅장함을 동반한 개방감이 중요하다. 그렇다고 리버브 등으로 공간감을 너무 크게 주면 각 연주들의 명료함이 떨어진다. 이 사이에서 적절한 지점을 찾기 위해 엔지니어와 함께 머리를 맞대었다.
원래부터도 생각하고 있던 것이지만 레코딩을 진행해보니 역시 4인조 록밴드 포맷의 연주만으로는 충분한 풍성함이 나오지 않았다. 예산이 넉넉했다면 무언가를 덕지덕지 덧대었을 수도 있지만 가능한 범위에서 해결하기로 했다. 네 명의 연주자가 레코딩 부스로 들어가 몇 번을 녹음해 축구장에서 함성을 지르는 듯한 코러스 사운드를 만들었다. 심플한 업라이트 피아노 연주와 클래식 오케스트라에서 사용되는 팀파니, 심벌즈의 소리를 조금 더 덧대는 정도로 마무리를 지었다. 꼬리가 긴 리버브들로 색채감을 보강하면서 작업 종료.
2019년 천용성의 [김일성이 죽던 해]를 제작한 직후 밴드 그들이 기획한의 EP를 만드는 작업에 돌입했다. 고등학생 시절 친구들과 열아홉살 스무살 당시 처음 라이브 클럽에서 연주를 시작한 시절에 대해 기록하기로 했다. 그렇게 [안녕] EP를 발매했다. 큰 반응을 얻어내는 것보다는 우리들의 연주를 기록해내는 것에 방점을 찍었기 때문에 작은 관심들에도 감사한 마음이었다. 가을부터 겨울까지 두 계절 동안 몇 번의 작은 공연을 진행한 우리는 싱글을 한 곡 발매하기로 했다.
2004년 처음 클럽에서 연주했을 때도, 15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어쨌건 밴드의 음악적인 리더는 나였고, 때문에 어떤 곡을 연주할 지에 대한 1차적인 고민도 나의 몫이었다. 그런데 이에 대한 정리가 상당히 어려웠다. [안녕] EP의 경우에는 2004년과 2005년 활동할 당시의 곡을 레코딩하자는 목표가 명확했다. 그러나 2020년에, 30대 중반의, 유부남을 포함한, 새끼 중년의 남자들이 모여 과연 무슨 곡을 연주할 수 있을까, 막막한 일이었다. 많은 곡을 썼다 버렸다.
'일교차'는 그렇게 쓰인 곡들 중 하나였다. 그들이 기획한이 기존에 연주하던 음악과 사운드적으로는 유사한 부분이 있었지만, 작곡 자체는 스웨디시 팝이나 프렌치 팝 등의 영향이 짙었다. 나와 기타리스트인 종훈 둘이 녹음한 어쿠스틱 버젼을 들어보면 곡 자체의 원래 뉘앙스를 보다 잘 파악할 수 있다.
이런 스타일로 곡을 써둔 다음, Judy and Mary나 Hysteric Blue 같은 스타일의 사운드를 입혔다. 어차피 그들이 기획한은 무슨 록스타가 되겠다는 식의 거창한 계획이 없는, 지극히 동네 밴드다운 동네 밴드를 지향하고 있었고 작품성 같은 것보다는 우리 친구들의 내적인 흥미와 재미가 더욱 중요했다. 라이브로 연주했을 때의 흥분감을 줄곧 떠올리며 편곡을 진행했다. 너무 어렵거나 복잡하지 않게, 그러나 연주하는 재미가 없을 정도로 단순하지는 않게.
비디오가 재미있지 않으면 내느니만 못하다는 의견에 모두 동의했으나, 도대체 어떤 비디오를 찍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의견 통일이 안 되었다. 엄청나게 싸워대다가 아마 베이시스트인 하군 아니면 드러머 박옥수가 '나머지 멤버는 가만 있고 너(=단편선)만 뻉이치는 뮤직비디오를 만들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그랬더니 모든 게 정리되고 그렇게 하기로 되었다. (나만 뺑이치면 되니 모두들 동의한 거 아닐까 ,,,) 나와 종훈은 음악을 주로 신경쓰기로 했고, 베이시스트인 병수와 드러머인 박옥수는 비디오나 디자인 같은 작업에 조금 더 신경쓰기로 했다. 분업이 확실해지니 작업에 속도가 붙었다. 모든 것을 D.I.Y.로 처리했다. 촬영과 포스트는 김수달(@zitersfilm)이 도왔고, 뮤직비디오 편집은 박옥수의 주도로 진행했다.
그렇게 발표한 '일교차'는 무슨 대단한 반응을 얻어낸 것은 아니지만 나름 꾸준히 사람들에게 들려졌다. (유튜브 조회수와 음원으로 인한 수익이 계속 생기는 것을 보면.) 그들이 기획한은 '일교차' 싱글 발매와 함께 잠깐동안의 왕성한 활동을 계획중에 있었으나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인해 모든 계획이 어그러졌다. 친구들과 재미로 하는 밴드가 공연을 못 하게 되니 재미를 찾기 어려워졌다. 한편으론 여전히 그들이 기획한이라는 밴드로 무엇을 들려주어야 할 지 어려워하고 있다. (다른 사람 작업물에는 감놔라 배놔라 잘 하면서 막상 자기 거 할 때는 아무 것도 결정 못 하는 사람이 된 기분이다.) 글을 쓰고 있는 2021년 현재, 활동과는 관계없이 여전히 복작복작 굴러가고 있는 단체 카톡방(주로 직장생활의 힘듬에 대해 토로하는 공간임.)에서는 농담처럼 '코로나19와 함께 자연스레 또 해체했다!'는 이야기를 주고 받기는 하지만, 과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