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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편선 Jul 09. 2019

프로듀서의 일 ― [김일성이 죽던 해]의 경우 (1)

트레이닝, 어레인지, 세션, 피처링, 자금 확보, 컨셉, 레코딩, 믹싱

천용성 [김일성이 죽던 해] 앨범 커버 이미지

* 신인가수 천용성의 [김일성이 죽던 해]를 작업하면서 프로듀서로서 한 역할을 정리한 글이다. 분량조절에 실패해 총 4회차로 나누어 올린다.


천용성 [김일성이 죽던 해] Full Album

목차


- 1회차 (https://brunch.co.kr/@danpyunsun/53)


1. 시작

2. 트레이닝

3. 어레인지 / 세션 / 피처링

4. 자금 확보

5. 컨셉

6. 레코딩 / 믹싱


- 2회차 (https://brunch.co.kr/@danpyunsun/54)


7. [김일성이 죽던 해]

    a) Track 1. ― 상처

    b) Track 2. ― 김일성이 죽던 해

    c) Track 3. ― 대설주의보

    d) Track 4. ― 동물원

    e) Track 5. ― 순한글


- 3회차 (https://brunch.co.kr/@danpyunsun/55)


    f) Track 6. ― 난 이해할 수 없었네(feat. 곽푸른하늘)

    g) Track 7. ― 전역을 앞두고(feat. 도마)

    h) Track 8. ― 사기꾼

    i) Track 9. ― 딴 생각

    j) Track 10. ― 나무(feat. 비단종)

    k) Track 11. ― 울면서 빌었지


- 4회차 (https://brunch.co.kr/@danpyunsun/56)


8. 쇼케이스 / 뮤직비디오

9. 텀블벅 / 리워드

10. 마스터링

11. 발매 / 프로모션

12. 끝


본문


프로듀싱이란 곧 번역이다.


요새 사람들은 결론이 빨리 나오는 것을 선호해 결론부터 써보았다. 조금 더 풀어쓰자면 다음과 같다.


프로듀싱을 한다는 것은 곧 음악과 음악, 음악과 사람, 사람과 사람 간의 번역을 수행하는 것과 같다.


이하의 글은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을 풀어쓴 것이다.  


1. 시작


프로듀서producer는 무엇일까. 글을 쓰기 위해 처음으로 네이버 사전을 찾아보았다.


프로듀서 : 연극 ·영화 ·방송 등에서 기획·제작에 종사하는 사람.


이하 긴 문장들이 이어지지만 부러 붙여넣진 않았다. 이상의 정의는 내가 아는 프로듀서의 개념에 부합하기도 하고 부합하지 않기도 한다. 내가 실제로 경험하거나 들어 알고있는 프로듀서는 이보다 훨씬 많은 일에 관여하는 이부터 거의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이까지 다양했다. 그 중에 나는 무엇이 되어야 했을까.


천용성과 만난 것은 2018년 2월이었다. 이전에는 오며가며 (정확히 두 번의) 안면만 있는 사이였다. 대뜸 이메일로 만나자고 해서 만났다. 자신이 음반을 만들고자 하는데 프로듀서가 되어달라 이야기했다. 그런데 나도 프로듀서가 뭔지 몰랐다. 그래서 물었다.


저한테 원하는 게 뭡니까.


용성의 대답은, 요약하자면 ‘모든 것을 다 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의 나는 의도적으로 음악과 보다 멀어지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새로운 일에 집중하고 싶었다. 음악은 취미의 영역으로 두고 싶었다. 그런데 ‘모든 것을 다’라면 너무 익스트림한 스포츠잖아. 하지만 익스트림 한 게 재미있긴 하지. 그 자리에서 수락했다.


물론 보낸 데모가 마음에 들어서 수락한 것이다. 용성은 내게 거의 전권을 주었다. 때문에 나는 내 마음대로 프로듀서 역할을 수행했다. 나의 일과 나의 쓰임새를 내가 스스로 정의했다는 이야기다.


2. 트레이닝


데모를 듣고 처음 받은 인상은 다음과 같다.
  

    이 자는 곡을 잘 쓰는 사람이다.  

    이 자의 작곡은 90년대 초반 가요 ~ 2000년대 초반까지의 인디 모던록과 닮아있다. ‘하나음악’ 류의 음악과도 유사하다. 그런데 몇몇 곡에서는 화성과 구조가 미묘하게 뒤틀려 있고, 이것이 현대적 혹은 동시대적인 어프로치로서 기능한다.  

    이 자의 작사 역시 앞서의 레퍼런스들과 유사성이 있다. 그러나 장치로서 역사·정치적인 알레고리들을 즐겨 쓰고 있고 이는 이 음반의 겹layer 혹은 결texture를 보다 다층적으로 직조하고 있다.  

    이 자의 음악은 동물원 류의 아마추어리즘에 강하게 기반하고 있다.  

    가수로서의 이 자는 아마추어다. 아마추어리즘에 기반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이 자의 목소리는 음악에 잘 어울린다. 그러나 발성, 발음, 호흡에 대한 기본기가 매우 부족해 레코딩과 이후 라이브에서 인상적인 모습을 보이려면 훈련이 필요해보인다.  

명징하게 직조했다.

실제로 용성의 작업실(=집)에 가서 몇 곡을 라이브로 불러보게 하니 약점이 그대로 노출되었다. 따라서 음반 제작은 뒤로 미루고 일단 3개월 간 보컬 레슨을 진행하기로 했다.


몇 회는 직접 진행했지만 내가 전문 트레이너가 아닌 탓에 이렇다 할 성과가 없었다. 마침 용성이 이전에 다른 이름으로 음원을 냈을 때 도움을 받은 보컬리스트가 있어 그에게 레슨을 받기로 결정했다.


이후 몇 개월 간 레슨을 진행했다. 용성은 레슨을 받는 와중 코인노래방을 즐겨 찾으며 가요들을 연습해보기도 했다. 나는 이범학의 “이별 아닌 이별”, 최성원의 “이별이란 없는거야”, 윤상이 쓰고 정연준이 부른 “파일럿” 같은 노래들을 연습해보면 좋겠다고 조언했다.


이범한 "이별 아닌 이별"
최성원 "이별이란 없는 거야"
정연준 "파일럿"

레슨을 진행했지만 그 과정을 거친 직후, 용성의 노래 실력은 크게 늘지 않은 듯 보였다. 헛돈과 헛시간을 쓴 걸까. 이로부터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마스터링이 모두 끝난 음원을 듣다가 용성이 이 작업을 처음 의뢰하며 건내준 데모를 들어보았다. 그 사이에는 분명한 질적 차이가 존재했다.


3. 어레인지 / 세션 / 피처링


용성 또한 자신의 노래 실력이 부족하다는 점에 대해 잘 인지하고 있었다. 때문에 용성은 마치 토이나 후기 김현철처럼, 대부분의 곡을 다른 아티스트가 부르길 원했다. 나는 몇몇 곡은 다른 아티스트가 불러도 좋지만 음반 전체를 그렇게 갈 필요는 없다고 했다. 세 가지 정도의 이유가 있었다. 하나. 용성의 작곡은 아마추어리즘에 기반해 있어 다른 아티스트가 불러도 무슨 박정현 마냥 잘 부를 수 있는 곡들이 아니었다. 다른 하나. 제작비를 감당할 수 없을 듯 했다. 또 하나. 용성의 목소리도 나름의 매력이 있었다. 결론적으로 데모 중 다른 아티스트가 부르면 효과적일 것 같은 곡들을 제외하곤 용성이 직접 부르기로 했다.


원래 보내온 데모는 14~15곡 정도였다. 나는 ‘풀렝스란 모름지기 40~50분, 10곡 내외’라는 구식의 생각을 가지고 살아온 사람이다. 작법상 비슷하게 들리는 곡들을 추려내니 11곡이 되었다. 11곡 짜리 음반을 만들기로 했다.


데모에서는, 아마추어적인 수준의 MIDI지만, 포크, 신스팝, 보사노바, 모던록, 발라드 등의 다양한 스타일이 구현되어있었다. 곡이 다채로우니 어떤 곡은 포크기타 또는 클래식기타 위주의 기본적인 포크 셋으로, 또 어떤 곡은 풀밴드로, 또 어떤 곡은 전자음악 베이스로 작업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릿 속에 떠오르는 이름들이 있었다. 이를 정리해 용성과 의견을 교환해가며 세션 및 피처링 리스트를 확정했다. 다행스럽게도 거의 대부분을 계획대로 섭외할 수 있었다.


편곡과 세션, 피처링에 대한 디테일은 이하 트랙별 프로듀싱 방향에 대한 파트에서 서술한다.  


4. 자금 확보


음반을 제작하기 위해서는 자금이 필요하다. 용성에게 물었다. 어느 정도 수준까지 제작비를 부담할 수 있는지. 모아놓은 돈과 이리저리 끌어모으면 500만 원까지는 부담할 수 있다 답변했다. 500만 원이면 풀렝스를 제작하기엔 모자란 돈이다. 기본적으로 음반을 제작하기 위해선, 작곡과 작사, 편곡 등이 준비되었다는 전제 하에 다음의 프로세스를 거친다. 레코딩 → 믹싱 → 디자인 → 마스터링 → 프레싱 → 발매 → 프로모션. (이상의 프로세스는 내가 함께 쓴 세기의 명저, 불세출의 필독서 《DIY 뮤직 가이드북》에서 자세히 소개되고 있다.)


세부 스펙에 따라 다르겠지만 통상 프레싱에 1,000장 생산 기준, 150~200만 원 정도의 예산을 책정한다. 마스터링은 전문 스튜디오의 경우, 곡당 15~20만 원을 정가로 본다. 방금 쓴 것들만 합쳐도 이미 수백 만 원이다.


결국 어디선가 추가적인 자금을 끌어와야 했다. 일반적인 판매를 제외하고, 뮤지션이 사전에 자금을 공수해올 수 있는 채널은 크게는 세 가지 정도다. 기관, 기업, 크라우드 펀딩. 일단 이 중 기업의 CSR 프로그램들을 이용하는 경우는 제외했다. 아무리 CSR이라고 해도 최근의 CSR은 기업의 브랜딩과 함께 가려는 측면이 있는데, 신인가수가 내는 [김일성이 죽던 해]라는 제목의 음반에 투자할 정신 나간 기업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정주영 선생님께서 아직 살아계셨다면 달랐을까. 아, 선생님…

전설의 소떼 방북 실황

크라우드 펀딩은 자금 상황을 보고서 작업 후반부에 결정해 진행해도 문제 없다. 일단 기관 등에서 하는 지원 프로그램부터 알아보았다. 이름만 들으면 알 법한 유명한 프로그램부터 전혀 알려지지 않은 마이너한 프로그램, 그리고 각종 가요제들에 닥치는 대로 지원했다. 거의 활동이 없었고 인지도도 없는 신인인 탓에 대부분 탈락했다. 우리는 원하는 만큼의 자금을 확보할 수 없었다. 결국 크라우드 펀딩을 하게 되는데… 크라우드 펀딩에 대해선 글 말미에 따로 파트를 할애해 서술한다.


5. 컨셉


앨범은 음원 만으로도 성립할 수 있지만 음반이라면 인쇄물이 거의 반드시 포함된다. 꼭 인쇄물이 아니더라도 음악의 컨셉을 시각적으로 전달하는 일은 중요하다. 디자이너에게 모든 것을 일임할 수도 있겠지만 음악에 대한 이해는 아티스트와 프로듀서가 보다 높다. 때문에 디자인에 대한 기초적인 컨셉을 제공하는 것은 우리의 일이다.


‘김일성이 죽던 해’라는 음반의 제목은 음반에 수록된 두 번째 곡의 제목이기도 하다. 이 곡의 제목이 주는 말맛이 좋고 단정한 음악과 강렬한 제목이 도치되며 발생하는 아이러닉함이 마음에 들었다. 자연스레 이를 음반의 제목으로 활용하게 되었다. 그런데 음반으로 [김일성이 죽던 해]를 접하는 이들은 음악을 듣기 전에 제목만 보고 지레 겁먹을 수 있을 것이란 우려가 있었다. 이를 효과적으로 상쇄시키기 위한 전략이 필요했다. 귀여워지기로 했다.


용성의 취미는 축구다. 대학생 시절 가입했던 축구 동아리에서 아직도 활동하고 있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뮤지션들이란 사람들은 대부분 운동, 특히 격렬한 구기 종목과는 거리가 먼 부류들이다. ‘축구인’이라는 컨셉이 유머러스하다 느꼈다. (인천의 레전더리 ― 허접스러운 ― 80년대 야구 구단인 ‘삼미 슈퍼스타즈’나 주성치의 《소림축구》 같은 이미지를 염두에 두기도 했다.) 마침 남북한은 간간이 축구를 매개로 정치적 화해의 제스처를 취하기도 한다. 이 컨셉을 밀어보았다. 판문점에 가서 축구복을 입은 채 축구공을 들고 사진을 찍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경성 축구단과 평양 축구단의 교류전이었던 경평축구대항전
소림축구(2001)

…하지만 엎어졌다. 용성에게 가지고 있는 축구복을 입고 사진을 찍어 보내라 했다. 내가 상상한 건 정대세나 손흥민 같은 이미지였다. 그런데 생각보다 후줄근한 이미지의 사진이 온 것이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용성은 손흥민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함께 아침마다 조깅하고 헬스장을 다니면 용성이 손흥민이 될 수 있을까. 포기하기로 했다. 한편 주변의, 특히 여성 친구들의 반대가 극심했다. ‘축구인’이라는 컨셉 자체가 너무… 여하간 별로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이 컨셉은 우리를 떠나갔다.

내가 상상한 것…
현실…

우연히 용성의 어린 사진을 보았다. 많이 역변했구나. 그런 생각을 하다가 아예 이런 이미지들, 그러니까 1990년대 초중반의 용성의 사진을 활용해보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디자이너인 Frog Dance의 김승후와도 이런 아이디어들을 포함해 여러 가지를 검토했다. (그는 원래 용성에게 중식 만두를 먹이고 싶어했다.) 결론적으로는 용성의 유년기 사진과 몇 가지 심볼을 활용해 [김일성이 죽던 해]라는 제목의 무거움을 중화시키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많이 역변했구나…


6. 레코딩 / 믹싱


용성은 신사동의 레코딩 스튜디오인 사운드 솔루션에서 서브 엔지니어로 일한 적이 있다. 그곳에서 장필순, 조동익 등의 대가들의 소리를 받아본 경험도 있다. 나는 엔지니어링을 깊이 공부한 적 없는 초보지만 나의 음반, 내 밴드의 음반을 만들거나 친구들의 음반에 참여하면서 엔지니어와 함께 레코딩과 믹싱을 진행해본 경험은 많았다. 개인 프로젝트인 회기동 단편선의 [처녀]는 엔지니어의 도움은 있었지만, 직접 레코딩과 믹싱을 주도해 만든 음반이기도 하다. 용성과 나 둘 다 자신 있을 정도의 수준은 아니었다. 그러나 자금이 몹시 모자란 상황이어서 레코딩을 직접 하고 믹싱도 일부는 직접 진행하기로 했다. 그래서 레코딩·믹싱 툴인 프로툴을 용성에게 약식으로나마 배웠다. 나 프로툴 쓸 줄 아는 사람 되었다.


DIY로 레코딩과 믹싱을 하지만 레코딩은 용성이 예전에 일했던 스튜디오에서 진행하기로 했다. 용성이 부스 안에서 노래를 하면 내가 콘솔룸에서 녹음을 받으면서 디렉션을 주고, 또 내가 기타를 치거나 코러스를 녹음하면 용성이 콘솔룸에서 녹음을 받았다. 세션이나 피처링 아티스트가 왔을 때는 주로 용성이 녹음을 받고 내가 디렉션을 주는 입장이었다.


레코딩·믹싱을 직접 한다는 게 말은 쉽지만 실은 굉장히 노동집약적인 작업이다. 한 번 모일 때마다 몇 시간 씩 투자해야 한 곡의 절반 쯤이 끝나곤 했다. 직장을 다니는 사람으로서 시간을 내 이를 진행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이는 결국 작업 스케쥴이 질질 늘어지는데 일조하게 되었다. 회사를 다니지 않았다면 한두 달 만에 끝났을 작업을 거의 6개월이나 소요했다.


(2편에서 께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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