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케이스, 뮤직비디오, 텀블벅, 리워드, 마스터링, 발매, 프로모션
* 신인가수 천용성의 [김일성이 죽던 해]를 작업하면서 프로듀서로서 한 역할을 정리한 글이다. 분량조절에 실패해 총 4회차로 나누어 올린다.
- 1회차 (https://brunch.co.kr/@danpyunsun/53)
1. 시작
2. 트레이닝
3. 어레인지 / 세션 / 피처링
4. 자금 확보
5. 컨셉
6. 레코딩 / 믹싱
- 2회차 (https://brunch.co.kr/@danpyunsun/54)
7. [김일성이 죽던 해]
a) Track 1. ― 상처
b) Track 2. ― 김일성이 죽던 해
c) Track 3. ― 대설주의보
d) Track 4. ― 동물원
e) Track 5. ― 순한글
- 3회차 (https://brunch.co.kr/@danpyunsun/55)
f) Track 6. ― 난 이해할 수 없었네(feat. 곽푸른하늘)
g) Track 7. ― 전역을 앞두고(feat. 도마)
h) Track 8. ― 사기꾼
i) Track 9. ― 딴 생각
j) Track 10. ― 나무(feat. 비단종)
k) Track 11. ― 울면서 빌었지
- 4회차 (https://brunch.co.kr/@danpyunsun/56)
8. 쇼케이스 / 뮤직비디오
9. 텀블벅 / 리워드
10. 마스터링
11. 발매 / 프로모션
12. 끝
계속 강조했지만 프로듀서는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인지, 그것이 아니라면 이를 수행할 적임자가 누구일지를 빠르게 판단해야한다. 회사를 다니는 터라 내가 혼자 쇼케이스까지 진행할 엄두가 나질 않았다. 공연을 기획하거나 에이전시 역할을 주로 수행하는 튜나레이블에 쇼케이스 기획 및 운영에 대한 대행을 맡기기로 했다. 어차피 함께 협의하면서 일을 진행하긴 하겠지만 내가 모든 키를 다 쥐고 가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편했다.
5월 쯤부터 모여 어떤 공간에서 쇼케이스를 열 것인지, 어떤 쇼케이스를 만들 것인지에 대한 상을 논의했다. 새로 자리를 옮겨 문을 연 공상온도에서 쇼케이스를 진행하기로 했다. 튜나레이블 측에서 쇼케이스와 동시에 용성의 작업기를 활용한 작은 전시를 진행해보면 어떨지 제안했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튜나레이블은 늘 공연과 더불어 관객에게 공연과 음악의 컨셉을 실연 외의 다른 방법으로 전달할 수 있을지를 고민한다. 내가 그들을 선택한 이유다.)
후술하겠지만 생각보다 텀블벅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어 쇼케이스를 두 번에 걸쳐 열게 되었다. 아직 쇼케이스는 진행되지 않은 탓에 이에 대해선 말을 아낀다. 관객들이, 직접 보고 들으며 느끼고 경험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성공적으로 진행되었으면 한다.
곽푸른하늘의 비디오는 용성과 함께 직접 촬영했고 편집만 용성의 친구인 도원에게 부탁했다. 본편의 뮤직비디오는 용성과 도원이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붙어 작업했고 나는 관여하지 않았다. 관여할 시간도, 체력도 없었다. 이럴 때는 전문가에게 믿고 맡기는 게 최선이다. 결과적으론, 아시다시피 음악과 닮아있는 좋은 비디오 한 편이 완성되었다.
4. 자금 확보에서 이어지는 이야기다. …당연히 자금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했고, 크라우드 펀딩을 진행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마 자금을 충분히 확보했더라도 크라우드 펀딩을 진행했을 것이다. 크라우드 펀딩은 주로 스타트업 규모에서 시장에 본격적으로 런칭하기 전, 자신의 상품을 알리고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쓰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시작하는 음악가란 실은 영세 자영업자에 가깝고 스타트업이나 마찬가지다.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들은 나름의 컨셉을 가지고 있고, 또 그에 맞는 나름의 팬 베이스를 구축하고 있다. 처음 시작하는 음악가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채널이다. 특히 용성은 공연을 통해 팬 베이스를 구축하고 음반을 만든 케이스도 아니기 때문에 그의 음악을 알릴 채널이 절실했다. 크라우드 펀딩을 하게 된 이유다. 소규모 창작자들에게 가장 어울리는 플랫폼이라 생각한 까닭에, 텀블벅을 선택해 진행하기로 했다.
펀딩에선 물론 메인 콘텐츠가 가장 중요하지만, 리워드도 중요한 부분이다. 메인 콘텐츠에는 이미 자신이 있었다. 김일성 메탈티 ― 늦었지만 원하시는 분들이 있으면 소량 생산할 용의도 있다 ― 등의 여러 리워드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용성이 작업하는 기간 동안 기록한 작업기를 책으로 내자고 제안했다. 배운 사람이 쓴 글답게 글이 좋았다. 이를 내기로 했다.
책을 내려면 책을 디자인 해야한다. 그런데 이곳저곳에 연락해 단가를 알아보니 책을 편집하는 데만 돈 백은 족히 깨질 것 같았다. 어쩌지? 고민하다가 직접 하기로 했다. 어차피 포토샵과 일러스트레이터는 대충이나마 다룰 수 있으니까 같은 어도비Adobe라면 크게 차이가 나지도 않을 것 같았다. (포토샵과 일러스트레이터를 다루는 것도 따지고 보면 어릴 적부터 밴드하면서 돈이 없어 직접 포스터를 만들어야 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기 때문이다.) 아는 디자이너에게 사비를 털어 적절한 페이를 지불하고 인디자인 원데이 클래스를 진행했다. 몇 시간 배워보니 역시 크게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집에 와서 뚝딱뚝딱 책을 만들었다. 당연히 전문 디자이너가 만든 것과는 퀄리티에서 차이가 많지만 그래도 책의 모양새는 나왔다. 이렇게 나는 인디자인 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펀딩을 시작할 때쯤 용성에게 물었다. 용성 씨, 결혼 생각 있습니까. 아니, 저는 딱히 없는데요. 그럼 청첩장 돌리듯 돌려봅시다. 펀딩 시작과 맞추어 펀딩 시작 소식을 청첩장 돌리듯 지인들에게 돌리기 시작했다. 사실 지인을 포함해, 타인에게 펀딩을 받는 것은 심적 부담이 큰 일이다. 그러나 예술가란 원래 사회의 서포트를 통해 작업을 전개해나가는 존재이며, 인류의 고고한 역사 속에서 이미 수많은 예술가들이 그렇게 해왔다… 는 식으로 마음 속으로 합리화 했다.
원래 용성과 친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용성의 인간관계를 전혀 모른다. 다만 축구 동아리를 오랫동안 해왔다는 것만 알고 있다. 축구 동아리 덕분일까, 초반의 펀딩 속도가 어마어마했다. 모금 목표액은 200만 원 정도였는데 첫 날 이미 배를 넘겼다. 펀딩은 첫 날과 마지막 날이 가장 중요하다. 첫 날 스타트가 좋으면 펀딩 플랫폼의 팬 베이스에서도 어라, 이 프로젝트는 뭔데 이리 빠르게 진행이 되지? 하면서 반응이 온다. 나란 개인, 튜나레이블, 그리고 그 외의 친구들이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면서 작지만 조금씩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펀딩은 큰 성공으로 끝났다. 물론 제작비가 워낙에 많이 든 프로젝트라 여전히 적자이긴 했지만 그래도 큰 폭의 적자는 막을 수 있었다. 또한 후반 작업 중 돈을 들일 수 있으면 너무나 좋지만 돈이 없어서 아쉽지만 D.I.Y.로 혹은 저렴하게 진행하려 했던 몇몇 부분을 돈을 들여 하기로 결정했다. 마스터링도 그 중 하나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돈이 없더라도 마스터링은 잘 해야하는 것인데 그 당시에는 돈이 너무 없어서 그런 판단을 할 수 없었다… 언제쯤이면 원하는 돈 펑펑 쓰면서 작업할 수 있을까? 누군가 나한테 사천만 땡겨주면 일단 천은 홍보비로 빼놓고 삼천으로 기깔나는 거 만들어줄 텐데. (홍보비는 역시 천 단위로 써야 제 맛이고 효과도 확실하다. 인디 생활 15년 차 홍보비 제대로 써본 적 없는 게 늘 한스럽다. 작업하다 보면 결국은 애초 예산의 150% 정도는 들어가기 마련이고 당연히 책정한 홍보비까지 다 써버린 다음이기 때문에… 프로덕션 플랜을 보다 철저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은 자금 규모를 어떻게든 늘리는 방법 뿐이다.)
결국 작업은 ― 슬프지만 ― 돈이다. 돈을 제대로 쓸 수 있다는 전제 하에, 들인 만큼 고대로 나온다. 물론 돈을 제대로 쓰는 것도 실력이기 때문에 아무한테나 돈 쥐어준다고 고대로 나오는 건 아니겠지만.
마스터링은 소닉코리아의 강승희 엔지니어와 진행했다. 이미 서술했듯 돈이 없어서 마스터링을 어떻게든 저렴하게 해치워야 하나…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텀블벅이 잘 되는 것을 보고 마스터링도 돈 들여 하자! 는 쪽으로 결의했다.
나는 마스터링에 대해 잘 알지 못 한다. 다만 음악을 CD에 담고 음원으로 출시하기 전에 상품으로서의 규격을 맞추고, 음악의 컨셉을 더욱 확실하게 하기 위해 색채감을 부여하고, 보다 여러 환경에서 음악이 평균적으로 잘 들릴 수 있도록 음향적으로 조정하는 과정이라는 정도로 이야기할 순 있다.
마스터링도 인간이 하는 일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과 작업을 했느냐에 따라 음악의 전체적인 컨셉, 색채감이 달라진다. 여러 스튜디오, 여러 엔지니어들 중에 고민을 하다가 강승희 엔지니어로 결정했다. ‘가요’를 작업하기에 좋은 엔지니어고, 믹스된 음악의 톤들을 보다 브라이트하게 만들어줄 수 있을 것이란 기대 때문이었다. 결론적으로 아주 만족스럽게 작업 되었다. 마스터링 안 했으면 어쩔 뻔 했어. 용성에게 여러 번 호들갑을 떨었다.
음원 발매는 포크라노스와, 음반 발매는 비스킷 사운드와 진행하게 되었다. 다른 이유가 있다기 보다는 두 곳 모두 믿고 맡길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포크라노스의 직원 분들과는 비단 유통 때문 만이 아니더라도 이미 종종 커뮤니케이션 하고 있는 사이였다. 운좋게도 시기가 잘 맞아 떨어져 포크라노스에서도 프로모션을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이 생겼다. (아무리 잘 아는 사이라 해도 회사에선 수익성이 중요하기 때문에 시기와 운때가 안 맞으면 도와주고 싶어도 도와줄 수가 없다. 정말 운이 좋았던 것이다.)
음반이 나올 때쯤 되니 당연히 해야하는 일이 산더미 같았고, 나는 본업이 회사도 바쁘게 돌아가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굉장히 스트레스풀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나와 용성 모두 거의 24시간 대기조로 성실하게 진행한 까닭에 큰 문제 없이 빠듯한 스케쥴을 소화할 수 있었다.
프로모션은 여전히 진행 중이며, 모든 전략을 미리부터 노출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아주 짧게만 쓴다. 어차피 나는 음반의 프로듀서인 것이지 매니저나 에이전시가 아닌 탓에 프로모션은 기본적으로 내가 할 일은 아니다. 여러 경험을 가지고 있으니 그에 대해 용성에게 어드바이스 해줄 뿐이다.
작업이 끝날 즈음, 용성에게도 여러 번 얘기했다. 이제는 프로듀서로서의 역할이 끝나가고 있고, 나의 삶은 나의 삶이고 용성의 삶은 용성의 삶이니, 용성은 이제 스스로 자신의 길을 만들어나가야 한다고. 다만 내 역할이 끝나기 전에 내가 가지고 있는 경험이나 데이터베이스를 최대한 용성에게 넘겨주고 가고 싶었다. 아낀다고 쓸 데도 없다.
음반을 작업하면 음반이 나오고 난 뒤의 일을 상상하게 된다. 웃을까 울을까. 음반을 한 번 듣고선 구석에 처박아 놓을까 아니면 다시 처음부터 듣기 시작할까. 이 음악은 오랫동안 사랑을 받을까 아니면 잠시 간의 이슈로 끝나게 될까. 상상을 하는 건 기쁘기도, 힘이 나기도, 무섭기도 한 일이다. 나는 작업을 진행하면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 신뢰하는 사람들 몇몇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 사람들이 이 작업을 좋아해주면 좋겠어. 이 사람들이 이 음반을 듣고 미소를 지으면 좋겠어.
프로모션은, 실은 별다른 것도 없고, 별다른 것을 할 돈도 없었다. 애초에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식으로 대자본이 투입되어 큰 돈을 벌어야 하는 프로젝트가 아니었다. 내 목표도 자연히 수익을 내는 것보다는 이 음악을 좋아할 만한 사람들에게 잘 들려주는 것에 맞추어져 있었다.
그냥 기초적인 것들만 진행했다. 보도자료를 보내고, 몇몇 매거진에 기사를 실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정도의. 다만 내가 떠올렸던 얼굴들, 그리고 내가 사랑하고 좋아하는 친구들 몇몇에겐 조금 더 빨리 미리 음반을 들을 수 있도록 메일을 보냈다. 좋다는 이야기를 해주신 분들도 있고, 답장을 보내주신 분들도 있었다. 아무 말 없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내가 그들에게 메일을 보낼 수 있었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도 감사한 마음이다.
서두에 “프로듀싱이란 곧 번역이다.”라고 썼다. 당연히 문자 그대로의 뜻이 아닌 은유다.
음악을 연주하는 것 또는 레코딩된 음원을 청자에게 들려주는 것은 일종의 커뮤니케이션이다. 텍스트도 일부 포함될 순 있겠지만, 기본적으론 청각과 시각 이미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대상을 설득해야한다. 설득한다는 것은 마음을 산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마음을 사기 위해서는 아티스트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가 명확해야 한다. 물론 일부러 명료함을 피하는 음악도 있다. 그것은 그것대로, 명료함을 명확하게 피해가고 있어야 한다. 그것 역시 명확함의 일종이다. (이 모든 이야기는 대중음악에 한정된 이야기다. 음악은 넓고 대중음악은 일부다. 다른 음악에는 다른 음악의 논리가 있을 것이다.)
나는 프로듀서로서 용성의 이야기를 더욱 선명하게 만드는데 가능한 노력을 다 했다. 이에 앞서 필요한 것은 용성의 이야기를 잘 듣는 것이었다. 나는 듣기보다는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인터뷰어로서 많은 사람들을 인터뷰 해본 경험이 있지만 고작 2~3시간 남짓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과 1년은 넘게 부대끼면서 같이 작업을 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얘기다.
내가 용성의 이야기를 잘 들었을까. (그 이전에 '잘' 듣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리 자신이 없다. 다만 그가 하는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그것을 실제로 구현하고자 많은 사람들과 커뮤니케이션 했다. 한 아티스트의 마음에서 출발해서 연주자, 엔지니어, 유통사와 여러 이해관계자를 거쳐 다른 사람들의 마음으로 연결시켜주는 일, 줄여서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일이 바로 내가 한 일이다. 번역이란 은유를 쓴 이유다.
작업을 안 한 지 오래 되었다. 비단 ‘음악’ 뿐 아니라 ‘아티스트로서의 삶’을 놓은지도 좀 되었다. 옛 밴드를 그만 둔 시점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당분간의 내 목표는 아티스트가 아닌 한 사람의 생활인으로서 최선을 다 해 바르고 옳은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 후’의 삶도 있겠으나 당장에는 생각할 겨를도 없고 시간도 없다. 모름지기 쓸 데 없는 자기 연민 따위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내가 가진 얄팍한 능력을 통해 무언가가 만들어지는데 기여할 수 있어서 좋았다. 내가 쓰임새란 게 아직 존재하는 인간이란 사실이 내겐 작은 위로가 되었다. 그 정도면 됐다. 고마워, 용성.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