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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라 Dec 08. 2023

나와 밀당하는 스페인

스페인으로 유학 가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학원에 등록했다.

나는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때만해도  스페인어를 제2 외국어로 가르치는 곳이

많지 않았다.

선생님은 문법을 강조하셨다. 스페인어는 동사변형이

가장 중요하므로, 동사만 정복하면 그게 끝이다라고

강조하셨다. 나는 그 말을 믿고 열심히 동사변형을 외웠지만, 다른 문법 공부에는 소홀했다.


'스페인어는 내가 공부를 안 해서 그렇지,

뭐 그렇게 어려운 언어는 아니야'라고 생각했다.

뭐 스페인어가 안되면 영어로 어떻게 되겠지라는 알량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 후에 나에게 닥칠 일에 대해서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     


한국 공항에선 출입국 관리소 직원분이

 내 비행기 티켓을 보면서

공항직원  "세비야로 가시는군요."

나  (살짝 미소)

공항직원  "세비야라면 미용을 배우러 가시나 봐요"

나  (머쓱해하며) "네"


순간 그게 무슨 말일까? 궁금했지만,

이내 ”세빌랴의 이발사“라는 유명한 오페라가 떠올랐다.

그때는 그럴 수나 았나 생각되었다. 

그이후로 한국의 한 방송국예능 프로그램에서

세비야의 오래된 이발소에서 머리 자르는 촬영을

하기도 했다.

 

지금이야, 마드리드에 도착하여 바로

 아베(스페인의 ktx와 같은 고속열차)를 타고

세비야로 곧장 내려가지만, 그땐 마드리드 바라하스 공항에서 이베리아항공의 세비야행 비행기로

트랜싯을 했다. 처음이니까, 어디로 어떻게 가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지 파악이 전혀 안 된 상태였다.


나름 스페인에서의  시작잘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 데,

세비야 공항에 도착해 보니, 내 캐리어를 찾을 수 없는 것이었다.


승객들이 거의 빠져나간 후, 우여곡절 끝에 내 캐리어를 찾아 무사히 숙소에 도착을 했다.

정말 아찔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 캐리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슈퍼마켓에서 도난당했다.

내가 슈퍼마켓에서 캐리어를 잃어버린 것에 대해 직원에게 컴플레인을 하자,

슈퍼마켓 직원들은 네가 간수를 잘했었어야지.

 라는 표정을 지었다.

네가 캐리어를 잃어버린 것은 안타깝지만,

우리 책임은 아니야. 이런 태도였다.


한국의 커피전문점에서 테이블 위에 노트북이나 휴대폰을 놓고 화장실을 다녀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났다.

이런 일들을  하나하나 열거하자면,

밤이 새도 다 하지 못한다.

게다가 주구 장창 스페인을 욕하고 싶지도 않다.

되도록 나는 좋은 점을 얘기하고 싶다.


한국에 오래 살았던  외국인이 한국에서 겪었던 불합리한 상황을 계속 얘기한다고 생각해 보면,

그것처럼 꼴 보기 싫은 일도 없을 것이다.

그게 현실이라 하더라도. 사람 사는 곳 어디나 비슷하다.


그래서, 나는 어떤 환상도 가지지 않고,

차분하게 어쩌면 냉정하게 내가 살아가야 할 도시를 관조하는 모드로 살았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안에는 항상 애정과 미움이 교차했다.

나는 왜 여기 있나? 이제라도 짐 싸서 돌아가야 하지 않나?

아니지. 아니지. 



가끔 마주하게 되었던 한국인 관광객들은

비슷한 질문을 많이 했다.

”스페인이 한국보다 못 살지요? “ 나는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과연 그 말에 어떤 대답을 해줘야 할까?


MBTI가 T인 나로서는

그건 나에게 할 질문이라기보다는 통계를 찾아보세요.

라고 말하고 싶었다.


어떤 나라를 볼 때 그 나라를 세계 경제 순위에 맞춘 시각으로만  본다면 굳이 스페인을 올 이유가 있나?


물론 나에게 물어봤던 그분들 친절했다.

내가 맘속으로 그렇게 대답의 회로를 돌리고 있었다는

얘기다.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조금 더 잘 산들

그게 무슨 상관일까?

내가 보기에 스페인사람들은  한국사람들보다  

행복하게 산다.


나는 아직도 그게 궁금하다.

스페인 사람들은 왜 행복할까?


그들의 속도가 있어서, 성질이 급한 한국사람이

스페인에 살면 미쳐버리지만,

모두가 지키는 속도와 함께 이뤄지는 질서에 익숙해지면 얻을 수 있는 평안함도 많다.


음식을  급히 배달하기 위해 인도에 오토바이가 질주하지 않는다. 한국에서 고객은 왕이다라는 명분 하게 심심치 않게 보이는 갑질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을은 그냥 서비스를 하는 사람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래서, 스페인경제가 그 모양 그 꼬락서니이지라고 말하고 싶은 사람도 있겠으나, 그것이 그들의 방식이다.

 그놈의 개인주의가 뭔지 질서도 참 안 지키지만,

인권은 앞서가는 것 같단 말이다.


북아프리카에서 오는 그 많은 보트피플에 대해서, 반감은 가지지만 그것을 마다하기보다는 이 세계가 함께 짊어지고 가야 할 숙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은 이유도 한편으론

존경스럽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때는 4강에서 한국이 이겼다는 이유로 내가 거리에서 들은 욕으로만 치면 어이가 없다.

나를 모르는 사람들은  치니따(중국인을 비하하는 말) 일본인으로 보다가

 한국이 스페인을 이긴 순간 이후부터는  나는

 자동적으로 한국인이 되어 버렸다.


지금이야, 한류로 인해서 점차 나아지고 있지만

때 이후로 한이 맺혀서 어떤 스포츠 경기에서건

스페인을 응원하지 않는다.


물론 라 리가에서 스페인팀끼리 붙을 때는 세비야풋볼클럽을 응원한다.

이건 어쩔 수가 없다. 축구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지만,

내가 10년을 보냈던 곳에 대한

애정까지 끊어 버릴 수는 없다.


한 번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국가대표팀이

축구경기를 펼치는 데, 포르투갈을  응원하다가 들켜서 분위기가 정말 머쓱해진 적도 있다.


무슨 상관인가? 나는 스페인 사람이 아니라, 한국사람이다. 내가 포르투갈을 응원하건 스페인을 응원하건 내 자유란 말이다.(그래도 조심해야 한다, 축구팬들을 자극하는 것은 옳지 않다. )


3년을 열심히 플라멩코를 익혀야지라고 생각했던

그 시간은 쏜살같이 흘렀다.

원래의 계획대로 라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왔지만,

그런 맘은 점점 옅어지고 있었다. 나는 돌아갈 수가 없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수박 겉핥기 같았고, 플라멩코를 배운 3년이 지난 시점은

이제 내 인생의 새로운 시작이라는 생각이 굳어졌다.      


스페인에 있으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애정과 미움의

 경계를 마구 드나들었다.

그러나 차츰 나는 플라멩코에 취하고,

올리브에 맛을 구분하고, 아침에 마시는 오렌지주스에

중독되어 갔다.


그렇게 나의 스페인은

내 삶의 페이지에 계속 추가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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