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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동수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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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수 Aug 26. 2020

시릴 정도로 아름다운 꿈이었다.

작은 아씨들(2019)

+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런 순간들이 있다. 문득 떠오른 기억들이 너무나 따뜻하고 반짝여서 슬퍼지는.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기에 더 이상 증명 할길 없는 추억들이 아름다워서 다시금 정신을 차리고 나면 현실의 잿빛이 더욱 짙어져 가슴 아픈 그런 순간들이 있다.


작은아씨들 (2019)


 영화는 둘째 조가 뉴욕의 출판사를 찾아가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손에 잔뜩 잉크를 묻히고 자신의 단편을 직원에게 보여주면서 친구의 소설이라고 이야기한다. 25달러에 판매된 소설을 보며 출판사 직원은 좀 더 자극적인 소설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녀는 꼬깃꼬깃 지폐를 손에 쥐고 웃으며 쉬지 않고 뛰어간다.


실화를 바탕으로 지어진 루이자 메이 올컷의 소설 작은아씨들은 총 4부까지가 출판되었다. 1868년 등장한 1부는 마치 집안의 네 딸, 메그, 조, 에이미 그리고 베스의 어린 시절에 관한 이야기, 2부는 그들이 성인이 되면서의 이야기를 그린다. 그리고 3부와 4부는 그 후의, 조의 아이들과 미래에 관한 이야기이다. 2020년 개봉된  작은아씨들은 여덟 번째로 영화화된 작품으로 그레타 거윅이 감독을 맡았으며 소설의 1부와 2부를 오가며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 혹은 소설 속과 소설 밖의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현실은 회색 빛으로 가라앉아 있다. 바쁜 뉴욕의 배경이라거나, 가명을 내걸고 팔기 위해 글을 쓰는 자신이라거나, 아픈 베스를 바라볼 수밖에 없는 조는 고독하다. 시대와 주변이 바라는 사람이 되지 못한 그녀는  너무도 단단하여 오히려 부러질 듯 위태롭다. 여성스럽고 아름다운 언니 메그와 다르게 항상 드레스를 태워먹고 고요한 베스와 다르게 치마 속에 바지를 입고 먼지투성이로 뛰어다니며, 애증의 막내 에이미와 다르게 자신보다는 가족이, 사랑보다는 자신의 작품이 더욱 중요한 사람이다.


하지만 조가 믿어온 만큼 세상은 녹록지 않다. 돈 많은 고모는 자신이 아닌 에이미를 선택해서 유럽으로 데려가고, 돈을 벌기 위해서는 출판사가 원하는 글을 써야 하고, 그래도 자신의 재능을 사랑해 줄 듯했던 교수에게 쓴소리를 듣고, 항상 가장 완벽한 자매였던 베스가 죽음을 앞두고 체념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볼 수 밖에는 없다. 입김이 날 정도로 차가운 그녀의 현실은 벽난로가 항상 따뜻하게 켜져 있는 과거 속의 자신과 계속 비교될 수밖에 없다. 모든 이가 그녀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모두가 함께였고 행복했던 그 시절엔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가 있다.


그녀는 결국 그 순간들을 해쳐나간다. 스스로 지혜롭게라는 말과 동떨어진 모습으로 구르고 소리 지르며 후회하면서. 자신의 사랑스럽고 또 미움 가득한 언니 동생들과, 세상에서 가장 자상한 어머니와, 친구와 연인 그 사이 어딘가의 이웃집 로리, 결혼을 강조하는 엄한 고모, 그 모든 이들과 부딪혀가며 싸워나간다. 조는 베스의 마지막 부탁으로 그녀의 아름다웠던 그 추억들의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글로 써 내려간다. 화려하지 않지만 실재했던, 소소하지만 가슴 벅찬 이야기들을 결국 완성해 나간다.


여성으로서의 삶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찾아가는 조는 결혼을 하고, 남편과 아이들 돌보아야 하는 시대의 기준에서 벗어난 독립적 여성이다. 하지만 그녀 역시 로리의 프러포즈를 거절하고 후회를 하며 다시금 부푼 마음으로 그를 기다린다. 로리를 사랑하냐는 엄마 로라의 질문에 그녀는 그저 사랑받고 싶다고 눈물짓는다. 자신으로서 존재하는 것은 언제나 외롭고 고독하다.


로리 역의 배우 티모시가 한 인터뷰에서 말했다. "이 영화는 페미니즘보다 휴머니즘에 가깝다."


우리는 이 마치가의 이야기가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그렇지 않을지 알 수는 없다. 아마 작가 자신도 확신할 수는 없으리라. 우리의 기억이 믿을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지 않는가. 또한 실제로 그녀가 원했던 조의 인생은 독자들에 의해 많이 바뀌어 버렸기도 했다. 19세기의 소설 속 조는 결국 결혼이라는 해피엔딩을 맞이하지만 반항아다운 작가 아니 조는 또 다른 장난을 가미한다. 수많은 독자들이 바라던 이웃집 로리와의 사랑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사랑을 그녀에게 찾아주는 것으로 소설은 끝이 난다. 영화는 그 모든 이야기가 소설이 되어 책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여주며 그 경계를 흩뜨러 놓는다. 진짜 조가 책을 받아 들면서 영화는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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