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oojeong Kang Feb 23. 2018

서울행

좀비가 되고 싶던 날

짐을 대충 싸서는 급히 집을 나선다. 곧 부산역이다. 다행히 기차 시간이 남았다. 얼른 승강장 번호를 확인한다. 화장실을 들르려고 한다. 갑자기 누군가가 내 팔목을 잡는다. 어떤 더부수룩한 머리를 한 남학생이다. 


이것 좀 가져가 주세요, 뭔가를 손에서 내보인다. 조잡하기 그지없는 액세서리 목걸이들이 작고 빳빳한 투명 포장지에 싸여있다. 학생이란다. 격려해주는 셈 치고 가져가 달라고 한다. 하트, 네모, 십자, 앵두 모양의 펜던트이다. 내 팔목을 잡지 않았더라면 난 뭐라 했든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그런데 계속 듣고 있다. 그냥 뿌리치고 갈 수 없다. 난 방금 전까지 이력서와 자소서를 고쳤고 나오기 직전 제출했다. 그리고 몇 주 전 지원한 서울에 있는 어느 회사에서 연락이 와서 면접 보러 가는 중이다. 그래, 화장실은 기차 안에도 있는 걸.


그래, 뭘로 만들었니, 어떻게 만들었니, 이런 걸 물으니 이렇게 저렇게 설명하면서 특히 앵두 펜던트를 보면서 자기가 디자인했기 때문에 가장 좋아한단다. 그간 노력한 것에 대해 열매 맺으라는 의미이기도 하고, 앞으로 노력하는 일들 역시 좋은 열매 맺으시라는 뜻이라고 하면서, 이거 하세요, 이거 하세요 그런다. 만원에 그걸 사고는 기차를 탄다. 열심히 하라는 응원과 함께, 기죽지 말라며 덕담도 아끼지 않는다.


기분이 좋지 않다. 난 한 학생을 도와주었다. 좋은 일했다. 5분 전 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다. 이상하다, 기분은 나아지지가 않는다. 그럼, 점심때이니 그 친구에게 밥 샀다 치자. 


아니다, 넌 그런 걸로 시장에 못 내놔, 특별한 매력이 있는 디자인도 아니고, 이야기해줄걸. 그러면 감정에 호소하기보다 실력으로 호소하도록 했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도 왠지 그 친구가 저렇게 노력하는데 기죽게 만들건 뭐야 생각했다. 


뒤늦은 후회와 함께 KTX는 시원하게 서울을 향해 달리는 중이다. 저는 열심히 했어요 격려해주세요 라는 코드에 속은 느낌, 나 역시 그동안 그런 코드로 다른 사람들의 격려와 응원을 기대해왔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누군가 나에게 그런 코드로 다가오면 또 속아 넘어가리라는 아마추어 같은 나 자신에 화가 나고, 삥 뜯긴 것 같은 억울함이 솟구친다. 그러다 서울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내가 뭐라고 인생의 선배질을 해댄 걸까 기가 막힌다.


내가 절박하다 보니 누군가의 절박함이 나의 절박함이 되어버린 것. 잘해야 하는데 열심히 살았던 것으로 그것을 실력이라고 말하고 싶은 나를 본다. 또...


얼마 전, 광복동 거리를 걷고 있었다. 어느 화장품 로드샵에 들어갔다. 조선족인듯한 점원이 날 안내하고 있었다. 어눌한 한국말로 이것저것 설명했다. 난 장밋빛 화사한 아이섀도에 대해서 알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그녀가 하고 싶은 말만 했다. 그게 아니라고 몇 번을 얘기했다. 그래도 그녀는 꿋꿋하게 그녀가 하고 싶은 말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녀가 추천한 제품을 전부 샀다. 그리고 집에 와서는 엄마 쓰시라고 몽땅 드렸다. 그냥 그곳을 나오면 되는 것이었는데... 왜 나는 설득당하는 걸까. 정말 설득당해주고 싶은 걸까.


열심히 살았으면 되었다고, 정성을 다했다면 되었다고 말하기에는 내가 가진 증거는 빈약하기 그지없다. 그래도 누군가에게 내가 그 증거가 되고 싶은 것 같다. 


이게 호구라고 해도 괜찮다. 


괜찮은 척하련다. 꾸준하게.

매거진의 이전글 November Rai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