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oojeong Kang Mar 29. 2016

그런 줄 알았다

습작 I

(Denver Art Museum, Sep. 9, 2015)


<나>

그녀로부터 전화가 온다. 오늘 그와 헤어졌단다. 잠깐, 또 헤어졌다고? 아, 도대체 몇 번째인가. 순간 확 피곤하다. 아니다. 뭐 익숙할 때도 되었다. 얘네들은 또 화해할 거다. 그가 화해를 신청할 것이다. 늘 그렇듯이. 내가 기억하는 것만으로 이미 다섯 번은 헤어진 것 같다. 왜라고 묻기도 전에 그녀는 방금 일어난 일들을 죄다 이른다. 조금 전 그가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이야기했단다. 그가 자길더러 자기 사람이 될 거라고. 그가 반지를 꺼내는 순간, 눈물이 났단다. 이럴 수가. 그 남자는 여전히 날 모르더라고. 수십 번 이야기했는데. 하필 프러포즈를 그렇게 하다니. 그 남자가 저 친구들이랑 다른 게 대체 뭐니. 그가 자길 좀 더 잘 알 줄 알았단다. 전화통을 붙잡고는 엉엉 운다. 아, 난감하다. 그녀가 뭐라고 하는 건지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다. 게다가 난 이 둘의 친구이다. 제발. 난 대체 누구 편을 들어야 하는 거니. 이건 뭐 어머니와 아내 사이에서 고민하는 불쌍한 남편 꼴이다. 대체 이건 뭐니. 내 생각은 안 하니. 생각해 보니 꼭 그렇지 만은 아닌 것이, 그녀는 당장 나에게 전화해서 모든 감정을 있는 그대로 퍼붓지만, 그는 오늘 밤 나에게 전화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시간이 지나서 심란한 마음이 진정되면 그때서야 무슨 일 있었냐는 듯이 나타나서 나에게 밥 먹자 그럴 것이다. 그러고는 그녀의 선물을 사러 가자며 나 보고 골라달라고 그럴 거다. 밥값을 그렇게 퉁치는 놈이다. 그러면 나도 걷다가 은근슬쩍 가판대에 파는 2-3만 원짜리 귀걸이를 가리키며 사달라 그럴 거다. 내 발품을 퉁치는 방법이다.


<그녀>

이 남자는 내 사람이다. 이 사람은 내 사람이다. 이렇게 말하고 싶지 않다. 우리가 사귀어도, 우리가 결혼해도 아닌 건 아니다. 이렇게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난 네가 아니다. 너도 내가 아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우린 각각 구별된 사람이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너도 나를 사랑한다. 이 것은 사실이다. 말장난이 아니다. 나한텐 심각한 것이다.


이별의 순간을 지나는 데는 매운 떡볶이와 낙지볶음이 제격이지. 그리고 콩나물국으로 속을 달래면 된다. 내 냉장고에는 반드시 들어있어야 하는 게 있다. 냉장실에는 매운 고추장, 파, 양배추가, 냉동실에는 떡볶이 떡과 어묵, 총총 썬 청양고추, 얼린 낙지가 항상 들어있다. 콩나물은 빨리 상하니까 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장 볼 때마다 항상 챙겨서 산다. 별스럽지 않은, 자주 있는 이별을 대비하기 위해 이렇게 장보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나의 스트레스에는 맵고 자극적인 게 최고다. 나의 튼튼한 위는 아직은 잘 버텨내고 있는 중이다. 아, 이 와중에 내 음식취향을 생각하고 있다니, 그 가아니라 내 위를 걱정하고 있다니, 나 자신이 좀 징그럽다. 하여간 지금은 가만히 앉아 음악을 듣고 싶다. 브라운 아이드 소울 2집. Nothing Better. 우리가 데이트 하기 시작한 후 처음, 함께 들었던 노래다. 이어폰을 하나씩 나눠 끼고는 서로 바라보지도 못하고 땅만 보며 들었었다. 지금은 오래오래 바라보고 싶다. 그의 눈은 편하고 깊고 따뜻하다. 예민한 나를, 쓸데없이 진지한 나를 안도하게 한다.


<그>

나에겐 그녀가 대뜸 고하는 얕고 빈번한 이별의 충격을 견디는 데는 나름의 비법이 있다. 아마 지금 그녀는 또 맵고 자극적인 음식을 찾아 식당가를 두리번거릴 것이다. 아니면 집에 들어가 매운 라면을 끓여먹을 테지. 나는 그녀와 다르다. 나는 맵고 자극적인 음식을 못 먹는다. 그리고 식도락에 별 관심이 없다. 우리는 데이트하면서 같은 메뉴에 꽂힌 적이 거의 없다. 나는 담백한 찌게류를 좋아한다. 그녀가 나와 아침에 데이트한다면 찌게류를 주문할 수 도 있겠지만-그녀는 기꺼이 날 위해 주문해주는 거라고 이야기할 테지만-저녁은 대체로 스트레스가 축적된, 그래서 풀어야 하는 때라며 대부분 매운 것을 먹고 싶어 했다. 나도 어느덧 단골 식당에 갈 때면 자동적으로 주문하는 매운 요리 메뉴가 생겼다. 잘 모르는 식당이라 하더라도 일단 메뉴판 옆에 빨간 고추가 그려진, 또는 HOT이라고 표시된 메뉴부터 고르는 습관이 생겼다. 


그렇지만 오늘 나는 맥이 풀렸다. 정말 이럴 줄 몰랐다. 프러포즈 이후 당연히 가리라 생각했던 레스토랑의 예약도 까맣게 잊어버렸다. 이젠 그녀도 마음을 준비했을 거라 믿었다. 우리의 네 번째 연애는 결혼에 대한 그녀의 두려움으로부터 그녀를 안심시키기에 충분했다고 생각했다. 프러포즈를 지켜보던 나의 친구들은 적잖이 당황했다. 술 마시러 가자고 했다. 그렇지만 난 지금 친구들 장단 맞춰 줄 마음의 여유가 없다. 당연히 그녀 뒷담화일 테니까. 친구들을 뒤로하고 혼자 집으로 왔다. 


무슨 상황인가, 나는 뭐고 그녀는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무엇이 잘못된 거지, 이어폰을 꽂은 채 책상 의자에 한참을 앉아 있는다. 그리고 늘 그렇듯이 그 재생 목록이 한 바퀴 돌고 두 바퀴 돌기 시작할 때 이어폰을 책상에 두고는 침대로 가 잠을 청한다. 그렇게 했는데도 잠이 오지 않는다. 이런 때 대처하는 또 나만의 습관이 있다. 다시 헤드폰을 끼고 키보드 앞에 앉는 것이다. 키보드 치면서 노래 부르는 것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대신 헤드폰으로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 치는 것을 좋아한다. 브라운 아이드 소울의 Nothing Better는 나의 넘버원 노래다. 우리가 데이트 하기 시작한 후 처음, 함께 들었던 노래다. 그렇지만 오늘 밤은 듣기 싫다. 치기는 더욱 싫다. 이럴 때는 New Trolls의 Concerto Grosso 앨범이지. 바이올린, 드럼과 일렉기타의 조합. 첫 트랙 Allegro가 나온다. 완전 내 마음을 연주하는 것 같다. 쿠쿠쿠쿠쿠쿵 쿠쿠쿠쿠쿠쿵. 차라리 비가 왔으면 좋겠다. 천둥번개까지 치면 완벽할 것 같은 밤이다. 오늘 밤은 이 트랙만 무한반복으로 들어야겠다. 버튼을 누른다.


오늘 밤 그녀는 어떻게 보내고 있을까. 그리고 내일은. 내일 나는 그녀에게 전화할까? 아니 전화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까? 이전에 헤어졌을 때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것인데, 이상하다. 겁이 난다.


아니다. Allegro는 그만 듣고 싶어 졌다. 두 번째 트랙 Adagio를 지나 세 번째 트랙 Cadenza가 흘러나온다. 생각보다 괜찮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대로 잠들 수 있을 것 같다.


<그녀>

다음 날, 여느 아침처럼 씻고 화장도 옷차림도 예쁘게 하고 식사도 잘 챙겨 먹고 출근한다. 그리고 퇴근하고 집에 온다. 또 다음 날이다. 출근하고 퇴근하고 집에 온다. 어느덧 일주일이 지난다. 밥은 먹고 다니는 걸까. 잠은 잘 자고 있을까. 회사생활은 잘 하고 있을까. 큰 팀 프로젝트 마감이 얼마 안 남았는데 마무리가 잘 되고 있을까. 마감 때가 되면 온통 에너지를 그곳에 쏟느라 위염이 또 도질 것 같은데. 약은 챙겨 먹고 있을까. 그런데 전화해서 물어보려는데 왜 머뭇거려질까. 


나는 왜 누군가의 사람이 되는 게 그렇게 싫을까. 아니, 누군가의 사람이라고 불리는 게 그렇게 싫을까. 난 너에게 진심인데. 난 너를 사랑한다. 내가 다섯 번의 이별을 고했다 하더라도 너는 내가 널 사랑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나도 알고 있다. 네 사랑이 변한 적 없다는 것을. 우린 곧 여섯 번째 연애를 할 거다.


어느덧 한 달이다. 이번 이별은 좀 길다. 우리가 즐겨 가던 레스토랑에 간다. 마주치고 싶은데 그는 오지 않는다. 저녁마다 들른다. 그가 올 때까지. 대체로 매운 음식을 주문하지만 가끔은 그가 주문하던 대구지리를 시킨다. 무슨 맛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콩나물국을 대신하는 훌륭한 메뉴다. 단백질도 풍부하니 콩나물 국보다 영양적으로는 훨씬 나은 메뉴다. 그는 자기가 주문해놓고는 국물 몇 숟가락 떠먹고는 사실 밥이랑 반찬을 주로 먹었다. 그러면서 그걸 왜 시킬까 생각했다. 그렇지만 이내 내 이야길 하느라 바빴다. 그러다 매운 음식을 한참 먹다가 입이 얼얼해질 때면 대구지리 국물을 떠먹곤 했다. 그럴 때면 그는 내가 먹기 좋게 대구지리를 내 앞에 놓아주곤 했다. 그런데 한 네 번째 혼자 먹을 때였나, 그때서야 깨닫는다. 아, 내 속 버릴까 봐 그랬구나. 갑자기 그가 너무 보고 싶어 진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 이렇게 당연한 것을 어떻게 까맣게 몰랐을까. 그런데, 그런데, 너는 아직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고 난 그를 참 모르는 것 같다. 인정하기 싫지만 사실인 것 같다. 미안하다, 너무 미안하다.


그가 궁금하지만 전화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당연히 전화해야지 하는 생각을 해서가 아니다. 이번 이별은 반지가 오갈 뻔 한 날에 고했던 것이다. 그리고 다섯 번째 연애는 예전의 네 번 보다 훨씬 길었다. 이번에는 좀 더 깊이 생각해야 할 것만 같다. 확실한 입장 정리가 필요한 것 같다, 나에게 결혼이란 뭔지. 그에게 결혼이란 내 생각과 다른 것 같다. 다시 도망갈 수는 없다.


내 사랑은 왜 이리 더디게 자랐을까. 그가 얼마나 열심히 우리의 사랑을 키워왔는데. 그는 햇볕처럼 따사로왔고 바람처럼 시원했으며 혹시라도 내 마음이 마를까 봐 늘 나를 들여다보며 넉넉하게 베풀어주었던 사람이었다. 아, 그렇다. 난 우리의 사랑을 키우는데 별로 관심이 없었다. 내 관심은 오직 내 사랑에만 있었다. 우리의 사랑이 아니었다. 난 그의 사랑을 배려한 적이 없었다.


그가 내게로 돌아올 줄 알았다. 내게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주고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는 아직 돌아오지 않는다. 이제야 미안하다고 말할 수 있게 된 것 같은데. 그 반지가 더 이상 내 것이 아니면 어쩌지? 그 날이 우리의 마지막 날이었으면 어쩌지?


<나>

다섯 번의 사랑을 시작한 것은 그였고, 다섯 번의 이별을 고한 것은 그녀였다. 그는 아직 그녀와 여섯 번째 사랑을 시작하지 않았다. 그는 나와 밥 먹는 것을 피하고 있다. 그녀도 내 전화는 받지 않고 있다. 나는 친구 둘을 잃어버리는 중이다. 나는 그 초라한 귀걸이 컬렉션을 저 구석에 밀쳐놓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VapvGNv8lcw

매거진의 이전글 서울행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