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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R May 15. 2019

육체적이고 실무적인  하루키식 라이프스타일론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2015년 여름, 보스턴 대학에서 일주일 간 머무른 적이 있다.

 그 무렵 내 주위에는 러닝이 대유행하고 있었고, 나 역시 달리는 일에 푹 빠져있었다. 매일 아침 일곱 시 기숙사에서 출발해 다리를 건너 케임브리지 쪽 강변에서 찰스강을 따라 달렸다. 반짝이는 강물 위를 미끄러지듯 지나는 조정 보트들을 구경하며 한동안 달리다 보면 푸르덴셜 타워가 점점 가까이 보이고, 타워를 기점으로 다시 다리를 건너 돌아오면 약 6km 정도를 달리게 된다. 그 코스가 나의 아침 러닝 코스였다.


 당시에도 하루키를 좋아하기는 했지만, 소설 위주로 읽던 입문(?) 단계였기에 (1) 하루키는 보스턴 근교에 산 적이 있다 (2) 하루키는 달리기를 좋아한다 정도만 알고 있었다. ‘내가 달린 것이 하루키의 글에 무수히 등장하는 그 찰스 강변이었다’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약 1년이 흐른 뒤 <찰스 강변의 오솔길>이라는 에세이를 통해서다. 침대에 누워 책을 읽고 있던 나는 책에 실린 찰스 강변의 사진을 보고 정말로 벌떡 일어났다. 세상에! 내가 뛰었던 그 곳이잖아!

 피곤한 몸을 이끌고 매일 아침 강가를 뛰었던 과거의 나를 칭찬해 주고 싶었다. 만약 하루키와 우연히 마주치게 된다면 당신과 같은 곳에서 달린 적이 있다며 자연스럽게 대화를 시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아직까지 하루키를 우연히 만난 적은 없다.



  1993년부터 1995년까지 약 이 년간 보스턴 근교에 사는 동안 (그 후에도 다시 기회가 생겨 일 년간 같은 곳에서 살았다) 지금까지 정경이 가장 인상 깊은 장소를 꼽는다면, 뭐니 뭐니 해도 찰스 강의 강변길이다. 나는 사정만 허락하면 매일같이 러닝화를 신고 일 년 내내 이 길을 달렸다. (중략)


  여름에는 가로수가 산책길에 짙고 시원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보스턴의 여름은 누가 뭐라 하든 멋진 계절이다. 하버드와 BU의 학생들이 레가타(조정, 요트, 보트 경기를 통틀어 이르는 말) 연습에 여념이 없다.


                                                                     

<무라카미 하루키, 찰스 강변의 오솔길> 





 이 책을 읽으며 가장 많이 생각한 것은 ‘육체적으로 글을 쓰는 일’에 관한 것이었다.

 하루키는 계속해서 말한다. 자신은 자리에 앉아 생각만으로 글을 쓸 수 있는 타입이 아니라,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몸을 움직이고 실제로 경험하며 이해도를 높여나가는 쪽이라고. 달리기를 통해 자연스럽게, 육체적으로, 그리고 실무적으로 소설 쓰기의 많은 것을 배웠다고 말이다.


 이 부분을 읽으며 하루키의 ‘언더그라운드’라는 작품을 떠올렸다. 90년대 도쿄에서 일어난 사린가스 살포 사건의 피해자들의 인터뷰를 모은 두툼한 책이다. 훌륭한 작품이라고 생각하지만 읽은 후 ‘대체/뭐하러 이렇게까지 했어야 했을까’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피해자들을 찾아내고, 설득하고, 직접 만나 인터뷰를 하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고 하루키 자신도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읽고 하루키는 ‘그렇게까지 했어야 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키는 그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 직접 만지고 경험해보아야만 했을 것이고, 그 경험을 통해 다음 소설들을 써나갔던 것이 아닌가 한다. 육체적이고 실무적으로 말이다.




 이 책에는 달릴 때의 슬럼프나 고통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그래서 좋았다. 반대로 이 책이 ‘매일 달리니까 정말 행복하다. 열심히 하면 할수록 잘 달리게 되었는걸? 러닝 최고! 다들 나를 따라 달리렴’ 같은 내용이었다면 정말 싫었을 것이다.

 달리는 즐거움 대신 하루키는 달리면서 느끼는 육체의 불완전함이나 자신의 보잘것없음에 대해 말한다. 퇴근하는 버스 안에서 마지막 부분을 읽다가 코 끝이 찡해졌던 이유는 불완전함을 받아들이는 하루키의 태도 때문이었다.

때로는 열심히 달려가며 살다가도 원하는 곳에 절대 도달하지 못할 것 같기도 하고, 때로는 원하는 곳이 어디인지조차 알 수 없게 되어 서글퍼질 때도 있다.

 하지만 어딘가에 하루하루 묵묵히 달리는 하루키가 있다는 것. 납득할 만한 장소, 혹은 그 비슷한 곳에 닿는 것만으로도 괜찮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나름의 위안을 얻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결국 무릎이 아프더라도 달려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무릎이 아프거나 기록이 형편없더라도, 그런 고통을 체감함으로써 얻는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러다 보면 나름 마음에 드는 장소에 도착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2018.10.01)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by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사상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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