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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R Dec 23. 2020

5. 몸에 그림을 새길 때  

연고를 바르며 기다리는 시간

2019년 12월 어느 날, 나는 낡은 건물 안에서 망설이고 있었다.
서울 강북의 오래된 부촌에 있는 오래된 상가 건물이었다. 삼층의 왼쪽에서 세 번째 문을 찾아오라고 했다. 설명대로라면 이쯤일 것 같은데 간판도 호수 표시도 없어 긴가민가했다. 이렇게까지 아무 표시가 없다니. 여기가 확실할지 한번 더 따져본 후 초인종을 눌렀다. 누군지 묻는 말도 없이 벌컥 문이 열렸다. 처음 보는 키 큰 남자가 문 손잡이를 잡고 무표정으로 들어오세요 라고 말했다. 조금 안도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날 거기에 간 건 문신을 하기 위해서였다.
문신에 어울리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따지는 것은 너무 옛날 사고방식 같긴 하지만, 굳이 따져보자면 나는 어울리지 않는 쪽에 가까운 것 같다. 직업도 스타일도 평범하다. 외적으로 뭔가 다르게 보이고 싶다는 생각도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때는 문신을 하고 싶어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소파에 앉아 목에 둘둘 감고 있던 머플러를 풀었다. 낡은 문 안의 공간은 의외로 넓었다. 벽에는 그림이 잔뜩 걸려있었다. 문을 열어주었던 남자는 내가 마음대로 상상해왔던 타투이스트 같은 느낌이 아니었다. 아주 얌전한 셔츠를 입고 있었다. 밖으로 드러난 곳에는 타투가 보이지 않았다. 테헤란로 스타벅스에 맥북과 함께 앉혀놓는다 해도 어색하지 않을 것 같았다.

잠시 사라졌던 그가 몇 가지 도안을 가져왔다. 도안은 미리 이야기해 둔 그림을 바탕으로 크기별로 준비되어 있었다. 처음엔 가장 작은 것을 골랐는데 셔츠를 입은 타투이스트의 반대에 부딪쳤다. 내 몸에 새기는 건데 대체 왜…라고 생각했지만 그에게는 분명한 원칙이 있는 듯했다. 나는 강하게 주장하는 사람에게 쉽게 휩쓸리는 편이다. 몇 번의 의견 교환 끝에 내 생각보다는 크고 그의 생각보다는 작은, 검지와 중지를 합친 정도의 사이즈로 결정했다. 마지막으로는 위치를 잡기 위해 뒷면에 물을 묻혀 실제로 스케치를 몸에 옮겨보았다. 거울 앞에서 잠시 고민하다 그대로 하기로 했다.

작업실 안은 적당히 어두웠고 마찬가지로 적당한 템포의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옷을 올리고 얇은 흰색 종이 같은 것이 깔려있는 작업대 위에 올라가 누웠다. 셔츠를 입은 타투이스트도 자리를 잡은 후 문신을 할 위치에 핀 조명을 맞췄다. 해체쇼를 앞둔 도마 위의 참치가 된 느낌이었다. 전원 버튼을 누르자 위잉 하고 낮은 소리를 내며 기계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라텍스 장갑을 낀 손가락들이 피부를 세게 누르는가 싶더니 얇은 바늘이 찌르고 들어오는 감각이 느껴졌다. 눈을 깜빡이며 작업실을 둘러보다가 눈을 감았다.

그때쯤의 나는 온갖 문제에서 영영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심정이었다. 아빠의 상태는 시시각각 좋지 않게 변했지만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회사는 (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전쟁터였고, 관계는 엉망진창이었다. 아무에게도 말 못 할 일들도 일어났다. 언젠간 나아질 거라는 근거 없는 낙관으로 버티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 낙관이 아니라 손에 잡히는 증거가 필요했지만 아무리 뒤져봐도 나타나지 않았다. 눈 씻고 찾아봐도 없으니 만들 수밖에. 그래서 나는 좋아질 것이라는 증표 비슷한 걸 몸에 새기기로 했다.

안 아파요? 셔츠를 입은 타투이스트가 물었다. 그가 문신의 종류별 통증 정도를 설명해주었다. 선보다는 면이, 검은색보다는 컬러가 더 아프다고 했다. 내가 새긴 그림에는 면도 색도 있었다. 저 이대로 잠도 잘 수 있을 것 같아요. 내가 잘 참는 건지 그 날 잠이 부족했던 건지 아니면 그의 실력이 좋았던 것인지 모르겠지만 정말이었다.

몇 시간이 지나고 나니 몸 어딘가에 작은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다시 옷을 입고 밖으로 나와 약국에 갔다. 문신을 한 부위도 상처니까 나을 때까지 연고를 발라줘야 한다. 그런데 새살이 솔솔 돋아나는 마데카솔이나 후시딘은 금지라고 했다. 새살이 너무 잘 돋아나면 완성도가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새 살이 빨리 돋아나 곤란한 경우가 있을 것이라고는, 마데카솔과 후시딘을 만든 연구원들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 같다) 그래서 새살과 무관한 바세린이나 비판텐을 사야 한다. 셔츠를 입은 타투이스트가 비판텐을 추천하길래 그걸 샀다.

문신이 아무는 데에는 한 달에서 한 달 반 정도가 걸린다. 그동안 하루에 두어 번, 가장 힘이 들어가지 않는 약지를 이용해 조심조심 연고를 발라주었다.

그 무렵 추천을 받아 탄 트완 엥의 <해질 무렵 안개 정원>이라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제목 그대로 책에는 정원이 등장한다. 이야기의 배경은 전후의 말레이시아. 주인공은 개인적인 이유로 일본식 정원을 만드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그래서 깊은 산속에 있는 일본식 정원에 찾아가 그 정원을 만든 아리토모라는 사람을 만난다. 계절이 깊어가며 정원의 모습은 시시각각 변하지만 변하는 것은 정원뿐만이 아니다. 선과 악, 사랑과 미움 사이에서 충동과 고집과 슬픔이 거미줄처럼 얽혀가며 주인공과 아리토모의 관계를 변화시킨다. 이 모든 과정이 정말 말도 못하게 아름답게 그려져 있다.

게다가 <해질 무렵 안개 정원>에서는 문신이 중요한 소재로 등장한다. 문신이 아물지 않은 시점에서 읽으니 주인공이 문신을 시작하면서 느끼는 감정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픔 뒤에 느껴지는 쾌감이나 (‘난 그가 내 몸에 무엇을 그릴지 기대하기 시작했고, 심지어 통증을 즐기기 시작했다. 바늘이 살을 찌르는 시간 동안은 마음속에서 아우성이 잦아들어서였다’), 지울 수 없는 무언가를 새긴 후 처음 몸을 바라보았을 때 느끼는 감정 같은 것들이 특히 그랬다.

그 책을 조금씩 나눠 읽는 동안 내 문신도 점점 자리를 잡아갔다. 완전히 아물어 더 이상 연고가 필요 없어졌을 땐 해가 바뀌어 있었다. 나에게는 아무도 모르게 옷 위로 그 부위를 살살 문질러보는 습관이 생겼다.

해가 바뀐 후에는 더 많은 일이 일어났다. 봄에는 죽음이, 여름에는 약속과 대화가 있었다. 가을에는 큰 프로젝트의 마무리가, 겨울에는 답없는 마음이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앉지도 서지도 못한 채 보낸 수많은 밤들이 책갈피처럼 끼워져 있었다. 잠을 이루지 못하던 초겨울의 어느 새벽, 다시 무언가를 새겨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바로 인스타그램을 열어 DM을 보냈다.

이번 장소는 겉으로 보기에 문신과 아무 관계도 없는 가게 안에 있었다. 카운터의 직원에게 여기 온 이유를 말하자 다른 사람이 나타나 나를 아래층으로 데려갔다. 가파른 계단을 따라 내려가자 발소리가 나지 않을 정도로 두툼한 카펫이 깔려있는 장소가 나왔다. 거기서 또 잠시 기다리고 있으려니 검은 옷에 검은 마스크를 한 사람이 나타나 나를 작업대가 있는 방으로 데려갔다. 쐐기문자를 닮은 문신이 빼곡한 손목 위에는 롤렉스가 감겨있었다.

이미 있던 그림 근처에서 흐르는 것처럼 내려오도록 위치를 잡았다. 이번에는 조금 더 여백이 많고 세밀한 그림이라 셔츠 입은 타투이스트가 아닌 롤렉스를 찬 타투이스트에게 찾아왔다. 롤렉스를 찬 타투이스트는 섬세한 결과물로 유명하다. 작업할 때는 집중을 하는지 숨소리도 잘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중간에 괜찮으세요 라고 한마디를 했을 뿐이다. 나는 또 똑같이 답했다. 저 괜찮아요. 이대로 잠도 잘 수 있을 것 같아요.

집에 돌아와 옷을 올리고 한참 그림을 바라보았다. 몸에 어렴풋한 통각이 남아있었다. 서랍에서 연고를 꺼냈다. 올해 이걸 또 쓰게 될 줄이야.

며칠이 지나자 상처가 아물며 색이 조금 변하기 시작했다. 자기 전 샤워를 한 후 거울 앞에 서서 작년 이맘때 했던 것처럼 조심스레 연고를 바른다. 아직 조금 쓰라리지만 눈을 찌푸릴 정도는 아니다. 잠시 연고가 흡수되길 기다렸다가 잠옷을 입는다. 웅크린 것 같은 자세로 침대에 누워 책을 보다가 늦은 새벽 까무룩 잠이 든다.

요즘도 여전히 밤은 길다. 작년 이맘때에 고민하던 일들 중 몇 가지는 더 나빠졌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그저 아물지 않은 그림 위에 연고를 바른 후 최대한 몸을 웅크리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시간이 지나가기를.

그리고 언젠가 전화벨이 울리고, 좋은 것이 찾아온다는 소식이 들리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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