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저출산 시대에 왜 둘째를 낳았냐면 말이죠,
나는 외동딸이다. 내심 배우자는 형제가 있는 사람이었으면 했지만 실패(?)하고 나처럼 혼자 자란 외아들과 결혼했다. 더블 외동인 우리 부부는 혼자 자라는 것의 장점도 단점도 누구보다 잘 안다. 문득 형제가 없다는 건 마치 솜을 짊어지고 강을 건너는 당나귀와 같다는 생각을 했다. 어릴 땐 아주 가뿐하고 편한 것이지만, 나이가 들고 물에 젖으면 점점 버거워지는 그런 느낌.
결혼하고 아이를 낳자마자 어쩐 일인지 양가 부모님들 건강에 적신호가 켜졌다. 모두 이전까지는 무척 건강하신 분들이었다. 첫 아이를 낳은지 백일도 안 되어 아빠가 쓰러졌고, 아빠를 간호하다가 도리어 병이 난 엄마는 아빠보다 더 오래 아팠다. 이듬해 시어머니는 화장실에서 넘어져 목뼈 수술을 하셨고, 같은 해 시아버지는 디스크 수술을 하셨다. 이 모든 것이 첫 아이가 두 돌이 되기 전 일들이다. 첫 번째 육아란 어찌나 막막하고 울적한 일인지… 나는 태어나 처음 겪는 극심한 수면 부족을 견디면서 스스로의 무지몽매함을 매 순간 깨닫는 중이었다. 그 와중에 부모님들이 아프시니 나는 그것에 감정을 할애하기가 힘들었다. 돌봐야 할 아이가 소율이 뿐 아니라 부모님들로 확장된 느낌이었는데, 내 인생에 한 번도 없었고 적성에도 맞지 않는 ’돌봄‘이 왜 이렇게 인생 전부를 차지하고 있는지 갑갑하기만 했다. 부모님들은 서운해하셨다. 아무리 합리적인 사람이어도 나이 들고 몸이 아프면 마음이 서운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렇게 다들 문병과 안부전화를 바라셨는데 그때의 나는 그게 왜 그리 힘들던지.. 사실 이제와 이야기이지만 내 자식 돌보느라 부모님에게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는 걸 인정해야 할 것 같다. 도리어 왜 내가 이렇게 힘든데도 다들 본인들을 신경써주기만 바라는지가 눈물나게 서운했다. “그러나 다른 애기 엄마들은 친정엄마도 시엄마도 계속 와주시는데 나는 대체 왜 이렇게 혼자인 거냐!”라고 외쳐본 적은 한번도 없다. 그것은 너무 사치스러워서 해보지도 못한 생각이었다. 그저 지금 나 대신 부모님에게 전화 한 통 해줄 형제 자매가 딱 한 명만 더 있었어도 좋았겠다는 생각을 했다. 더도 덜도 말고 딱 한 명만. 그 한명이 있다면 나의 부담도 절반이 되고, 그들의 서운함이 절반이 될 텐데… 외동의 단점을 그렇게 온몸으로 느낀 건 처음이었다.
문득 그 때 나의 18개월 아기 소율이가 보이는 거다. 이 아이가 30살이 되었을 때, 높은 확률로 아직 살아계실 100세 시대 조부모 4인과 부모 2인. 이제 건강하고 즐거울 일보다 아플 일이 너무 많아질 그 6인이 모두 각종 명절과 경조사와 숱한 병치레를 겪을 때 소율이의 전화만 기다리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에 미치자, 그 아이가 너무 가여웠다. 내가 이렇게 애지중지 키운 사랑하는 소율이가 내가 지금 부모님께 느끼는 이 부담감으로 나를 바라보겠구나 하는 생각에 너무 슬퍼져서 눈물이 주륵주륵 흘렀다. 이 아이가 앞으로 겪을 힘든 가족사들을 제거할 수는 없겠지만, 그 피해갈 수 없는 모든 일들을 겪는 데 있어서 서로 대책도 이야기하고 같이 부모 흉도 보면서 공감할 수 있는 존재 한 명이 너무나 소중하다는 것. 그걸 당시의 내가 너무나 절실히 깨달았기에 둘째를 가졌다. 내가 돌봄으로 가장 힘들었기 때문에 또다른 존재를 돌보는 선택을 했다니 아주 아이러니다.
어쨌든 그런 마음이었기에 더욱이 자매를 낳아 다행이다. 세 살 터울로 태어난 둘째가 어언 5살이 되었고 자매는 내내 꽁냥대고, 계속 싸우고, 급격히 깔깔대고, 또 갑자기 서로를 싫어한다.. 둘이 함께 가는 길은 솜이 아니라 소금을 싣고 강을 건너는 것과 같으리라 기대해 본다. 처음에는 무겁고 불편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물에 젖으면 오히려 가벼워지는 여정이기를. 분명 그걸 머지 않아 깨닫게 되기를. 바라고 또 바래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