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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면 속에 담긴 감정의 드라마

마크 로스코와 아이의 그림

by Leading Lady

교환학생 시절, 베니스의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마크 로스코(Mark Rothko, 1903-1970)의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 느낀 감정은 따스함이었다. 키를 훌쩍 넘는 커다란 캔버스에 차분한 색상, 색과 색 사이의 흐릿한 경계가 어쩐지 나를 받아들여주는 타국의 관대함처럼 느껴져 한없는 안락함을 주었다. 외환위기로 원-유로 환율 2300원이던 시절, 5유로짜리 점심은 스킵하면서 10유로짜리 미술관을 선택하던 유학생에게 따스함을 줄 수 있는 그림이라니. 로스코는 그의 작업을 통해 보는 이로 하여금 명상적 사색과 감정적 울림을 선사하고 싶다 말한 바 있다. 예술의 해석은 감상하는 사람에 따라 여러 갈래일 수 있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로스코가 의도한 시각적 전략이 잘 먹혀든 셈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로스코 자신은 굴곡지고 어두운 내면적 삶을 살았다. 유대인 박해를 피해 10살 때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이민한 그는 예일대학교에 입학했지만 엘리트주의와 유대인 차별에 염증을 느끼고 중퇴했다. 이는 그가 훗날 제도권과 지성주의가 인간의 진실한 감정을 담아내지 못한다고 비판하며, 시그램 빌딩 벽화 계약을 파기하는 등 평생에 걸쳐 보인 타협하지 않는 태도와 일관성을 보이는 부분이다. 그는 평론가의 권력이 강력하던 시기 미국 추상표현주의를 미술계로 편입시킨 지성의 힘에 반기를 들고자 했고, 그의 작업을 선택해 준 뉴욕의 엘리트에게 환멸을 느꼈으며, 그에게 명예와 부유함을 선사한 자본주의의 달콤함을 거부하며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2024. 9. 4. ~ 10. 26. 페이스 갤러리 서울에서 열렸던 마크 로스코와 이우환의 전시 전경(출처:연합뉴스. 페이스갤러리 제공)


캔버스의 평면성을 긍정하는 색면 회화

그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현재 마크 로스코는 20세기 미국 추상표현주의를 대표하는 화가일 뿐 아니라, 지속적으로 경매 최고가를 경신하고 꾸준히 재판매되면서 세계 미술시장을 견인하는 거장이 되어 있다. 평론가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urg, 1909-1994)는 모더니즘 회화의 과업이 문학이나 조각 같은 다른 예술 장르의 요소를 제거하고, 회화 고유의 매체적 특성, 즉 '평면성(flatness)'을 탐구하며 스스로를 순수화하는 데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러한 관점에서 로스코를 잭슨 폴록의 행위 중심 회화와 구분하여 '색면 회화(Color Field Painting)'의 선구자로 지목했다. 그린버그에게 로스코의 작품은 인물과 배경의 구분을 완전히 해체하고, 거대한 색면 그 자체를 통해 캔버스의 2차원적 현실을 긍정하는 순수한 시각적 경험의 정점이었다.


작품 앞에서 마주하는 숭고의 드라마

그린버그가 로스코의 그림이 어떤 서사나 상징이 아닌, 오직 색과 형태의 관계로만 이루어진 '자율적인' 예술이라고 본 것은 추상회화에 대한 명백한 찬양이다. 그러나 로스코 자신은 그의 작업이 추상화로 분류되는 것을 싫어했고 그의 화면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요소인 '색채'에도 관심이 없다고 말했다. 대신 그는 이 색면 사각형들을 침묵의 드라마를 연기하는 '배우들(performers)'이라고 부르며 미학적 감상을 배제한 예술적 경험 자체를 강조했다. 자신의 유일한 관심사가 '비극, 황홀경, 운명과 같은 인간의 근본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라며, 종교가 힘을 잃은 세속의 시대에 자신의 그림이 인간의 유한함을 절감하게 하는 체험의 공간이자 한 편의 숭고의 드라마이길 염원했던 마크 로스코. 그의 그림 앞에서 한참을 머물렀던 스물 세 살 대학생은, 시간이 흘러 30대 후반의 엄마가 되었다. 그리고 어느 날, 아이가 바닥에 펼쳐 놓은 연습장을 보았을 때 어쩐지 로스코와 그날의 감정이 떠올랐다.


아이가 단일 색으로 채운 연습장(좌), 마크 로스코의 1953년 작품(우)


아이는 스케치북 두 페이지에 걸쳐 색면을 만들었다. 핑크색과 빨간색 크레용으로 채운 페이지를 합쳐 보면 마크 로스코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거대한 색면 구성과 유사하다. 음악은 아무리 좋아도 들으면 사라지지만, 아무리 작은 종이라도 이 위에 인간의 경험과 감정을 표현할 수 있고 이것이 손실 없이 누군가에게 전달될 수 있는 것은 평면 회화가 가진 큰 장점이 아닐까. 나는 아이가 채운 A4 용지만한 평면으로부터 그린버그가 말한 순수한 시각적 경험과 예술의 자율성을 느꼈다. 로스코가 색채나 형태가 아닌 인간의 근본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다고 한 것처럼, 아이 역시 구체적인 형상이나 대상을 그리기보다는 색채 자체를 통해 자신의 내면을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발상의 구체성과 표현의 추상성: 수영장을 그린 거라고?

그렇다면 이날 아이의 내면은 어떠했을까. 41개월은 구체적 사물들을 꽤 명확하게 그릴 수 있는 시기인데, 왜 이날은 이런 방식을 선택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듣고 싶었다. 그리고 아이는 놀랍게도 이 그림을 '수영장'이라 말했다. 아이에게 이 추상적 평면은 명확한 서사를 지닌 구체적인 공간이었던 것이다. 아이의 말대로라면 시각적 유사성에도 불구하도 이것은 로스코의 그것과 작가의 의도 측면에서는 대척점에 있다. 아이는 수영장의 구체적인 형태(사람, 물결, 다이빙대 등)를 그리지 않았다. 대신 수영장에서 느꼈을 법한 근본적인 감정을 핑크색과 빨간색이라는 색채를 통해 표현했다.


이 때는 아이가 수영을 배우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일반적인 수영장 물색과는 다른 핑크색을 사용한 것이 독특하다. 색채심리학에 따라 이를 아이의 주관적인 감정으로 치환해 본다면, 우선 핑크색은 부드럽고 온화한 감정을 나타낸다. 아이가 수영장에서 느끼는 편안함, 즐거움, 혹은 따뜻한 물의 느낌을 표현한 것일 수 있고 이는 수영장이 아이에게 안전하고 행복한 공간임을 암시한다. 또한 핑크색보다 강하고 밀도 높은 필치로 채워진 빨간색은 활기찬 에너지와 강렬한 경험이 표현된 것으로 보이며, 활발한 신체 기능과 역동적인 활동에서 오는 흥분, 친구들과 함께하는 데서 오는 경쟁심을 상징했을 수도 있다. 강한 필압은 아이의 높은 에너지와 자기주장을 반영하며, 수영이라는 활동에 대한 아이의 적극적인 참여와 즐거움을 보여준다.


그림은 경험을 그리는 게 아니라 경험 그 자체입니다.
- 마크 로스코

결론적으로, 41개월 아이의 그림은 마크 로스코의 거대한 캔버스처럼 관객의 감정 고양과 몰입을 의도하지는 않았으나, 이 그림을 보며 관객이 결국 느끼는 것은 서사나 구체적 상징보다는 즐거움, 따뜻함, 열정 등 인간의 근본적인 감정이라는 점에서 로스코 작품과 유사한 방식으로 관객에게 다가간다. 그림은 그 자체로 하나의 '경험'이며, 그 안에 담긴 작가의 감정과 에너지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중요하다. 이 그림은 수영장이라는 상상 속 공간으로 나를 초대했다. 단순한 시각적 재현을 넘어, 아이의 감정적 경험을 공감하게 하는 매개가 되어 주었음에 감사할 따름이다.



<참고문헌>

https://www.theartstory.org/artist/rothko-mark/

https://www.guggenheim.org/artwork/artist/mark-rothko

https://www.theartstory.org/movement/color-field-pain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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