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생겨 버렸다.

아직 못다한 신혼이여...

by Leading Lady

결혼율도 출산율도 최저를 기록하는 때, 나는 덜컥 아기를 가졌다. 첫 느낌은.. 두려움과 억울함이었다. 우리는 아이를 간절히 기다리는 부부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연애기간이 짧았던 우리는 적어도 1년은 신혼을 즐기겠다고 공언하곤 했던 것이다. 생명은 정말 신이 주시는 게 맞는 건지, 나름 철저한 피임에도 불구하고 불과 한 달 만에 생겨버린 아기.. 오빠와 나는 한참 동안이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막연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결혼했으니 어서 애를 낳으라고 어른들이 으례히 말하셔도 '키워주실 거냐'며 또박또박 말하곤 했던 우리 부부는 정말 당황했다.


모성애보다 먼저 오는 것; 몸과 멘탈의 무너짐

임신을 알게 된 후 며칠간 나는 '나란 인간은 원래 모성애라는 걸 장착하지 않고 태어난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이 생길 만큼 이기적인 생각들만 가득 들었다. 하고 싶었던 공부, 취미, 여행, 일.. 아이가 없다면 할 수 있는 많은 것들과 그에 대한 계획들이 떠올랐고 출산 후의 현실을 생각하면 막막했다. 그리고 그저 직장인일 뿐인 내가 한심했다. 나는 지금 나 자체로 너무나 아무것도 아닌데, 이렇게 애를 낳았다간 누군가의 엄마로 내 평생의 정체성이 정해질 것 같았다. 끔찍하게 우울했다. 내 인생 이대로 끝나는 거 아니냐며 오빠를 잡고 흐느껴 울었다.

미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있는 사이 급격하게 몸에 변화가 시작되었다. 가슴이 조금씩 뭉치는가 싶더니 너무 딱딱해졌다. 오빠한테 살짝 팔짱만 껴도 아프고 속옷에 스쳐도 아팠다. 입덧이 시작되는 것은 정말 놀라웠다. 사람이 이렇게 갑자기 종일 숙취상태로 살아가게 되다니.. 출근길 붐비는 지하철에서 나는 사람의 체취가 너무나 역겨워졌다. 맛있는 걸 먹는 즐거움을 내가 예전엔 알았던가 싶을 정도로, 언제나, 전혀 먹고싶은 게 없었다. 오후가 되면 참을 수 없을 만큼 졸음이 쏟아졌다.


내가 정말 이걸 해야 할까.. 내 모든 걸 포기하면서?

중절 수술을 진지하게 고민했다. 몸도 마음도 전혀 준비되지 않은 나에게서 태어날 우리의 아이가 걱정되어서.. 라는 건 거짓말이다. 아이가 아니라 오로지 내 걱정 때문이었다. 배가 나오고 허리에 살이 찔 내 신체와 하루종일 피곤한 상태로 육아를 하게 될 내 미래가 걱정되었던 거다. 수유까지 최소 2년간 염색도 헤어 케어도 하지 못해 푸석하게 자라날 머리가, 살이 터서 흉해질 배와 가슴이, 잠을 못 자 거칠어질 피부가, 거울로 이 모든 걸 확인하며 울적해질 내 멘탈이 걱정되었다. 심지어 지금 이렇게 걱정되고 모든게 불안한 것조차 임신 초기 증상이라는 걸 보고 더욱 이유없이 원망스러웠다. 적어도 미래가 걱정되는 건 내 성격 때문인 줄 알았는데 그것조차 호르몬 때문에 더 증폭되는 거였다니..

아이러니하게도 임신을 알고 엽산과 비타민은 꼭 챙겨 먹었다. 평소 약먹는걸 너무 싫어해서 종합비타민조차 먹지 않았는데 이상한 의무감이 생기는 걸 막을 수가 없다. '혹시 낳는다면 건강한 아이를 낳아야 하니까'라며, 그걸로 내 부족한 모성애의 죄책감을 씻기라도 하듯 꼬박꼬박 약을 먹었다. 사실 생각보다 아이를 지우기는 힘이 들었다. 너무 쉽게 생겨서 지금은 임신이 무척 쉬운 것 같이 느껴졌지만 그렇다고 다음에 또 생기리라는 보장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야말로 신의 뜻이라는 걸 이번에 겪었기 때문에 더 두려웠다. 만약 수술했다가 나중에 다시 생기지 않을 경우 그 후회는 어떻게 감당할지 상상하기 어려웠다. 오빠는 나의 의사가 제일 중요하다고 말했지만, 그 말은 도리어 부담스러웠다. 잘 생각해보면 나는 나의 개인적인 욕심을 제외하면 낳지 말아야 할 이유가 거의 없는 것이었다. 우선 결혼을 했고, 헌신적인 남편도 있고, 육아휴직을 쓸 수 있는 직장도 있는 내가 이런 고민을 한다는 것은 사실 누군가에겐 매우 사치일 수 있었다. 게다가 나는 "저는 한국에서 아이 낳고 키우기 싫어요"라고 하는 사람들이 흔히 가지는 사회에 대한 염세도 없었다. 꿀 같은 신혼을 즐기고 나서 아이는 1~2년 후 쯤 가질 생각이었던 나는, 지금 이 결정의 책임이 사회나 가족이나 다른 누군가의 탓으로 돌릴 수 없이 온전히 나에게 돌아올 거라는 걸 알았다.


아이를 낳아야 하는 진짜 이유.

그러나 결정적인 생각의 전환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다가왔다. 전국 대부분 임산부들이 애용한다는 임신 어플을 다운받고 나서 며칠 후, 결국 나는 아이를 낳기로 결정했던 거다.(광고 아님..) 그건 마치 예전에 있었던 게임 '다마고치'의 아기 버전 같았다. 임신 주수별로 아이 캐릭터가 조금씩 변화하는데, 그 아기가 해당 임신 주수에 맞는 성장 추이나 엄마의 몸의 변화 등을 이야기해주고, 또 적절히 엄마와 아빠에게 개인적인 멘트를 하게끔 프로그래밍 되어 있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오늘은 귀에 작은 구멍이 뚫렸어요", "엄마 몸 속은 흔들 흔들, 정말 기분 좋아요", "엄마, 오늘도 함께에요" 이런 식이었다. 내가 불편하게만 느꼈던 몸의 변화들이 어쩐지 모두 생명 탄생의 과정이라는 의미부여를 하게 했다. 남편한테는 "저는 아빠를 선택하고 이 곳에 온 거에요", "엄마는 지금 아빠를 의지하고 있어요"라고 이야기해서 아직 아기에 대한 실감이 나지 않는 오빠를 왈칵 울리기도 했다. 나 역시 내 몸 속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한 작은 인간이 나에게 100%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걸 인지하게 되면서 그 신비감에 눈물이 났다. 물론 돌아와서 안 사실이지만, 우리는 임신 후 아프리카를 36시간 이상 왕복 비행하고 말라리아 약을 먹고 매일 밤낮으로 술을 마셨는데, 그 험한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살아남아 준 아기가 대견하고 고마웠다. 임신을 알게 된 직후, "아직 사람 아니니까 자꾸 인격부여하려고 하지 마" 라고 말했던 게 속이 아리도록 미안해져서 또 울었다.

나는 아이를 낳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 정말 많이 생각해 보았다. 사실 이미 가져버린 입장에서 최대한 합리화를 해 보려 했는데, 아무리 해도 내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방식 속에서는 논리적으로 아기를 낳는다는 결정을 도출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생각해도 출산과 육아는 내 커리어, 내 외모, 내 건강을 어느정도 희생해야만 할 수 있는 제로섬 게임에 가까웠다. 그러나 결국 아기를 낳는 이유는, 그냥 그것이 '생명'이기 때문이었다. 나의 30여년간의 삶의 방식, 내가 하고싶었던 것들, 내 꿈이나 계획과는 아무 상관 없이, '내 몸이 이 한 생명을 탄생시키는 것만으로 숭고할 수 있다'고 생각한 그 순간이 이유였다. 그래, 어쩌면 그것만으로 충분한 게 아닐까.. 전쟁통에도, 가난에도, 객관적으로 절대 낳으면 안될 것 같은 상황에서도 계속 태어났던 수많은 아기들도 모두 같은 생명으로서의 의미가 있는 거 아닐까.




최소한의 다짐, 나와의 약속

아직 출산 후에 대한 체계적인 계획은 없다. 1년 정도 육아휴직을 쓰고.. 음 그 이후는 정말 모르겠다. 결혼 후 3개월차, 아직 누군가의 아내라는 정체성도 익숙치 않은 지금, 갑자기 턱 주어진 엄마라는 역할이 엄청 어색하지만, 그래도 부딪혀 보려고 한다. 지금껏 전혀 몰랐던 것들을 많이 배울 것 같아 설레기도 한다. 지금 바라는 것은 우선 아이가 건강하게 태어나는 것, 그리고 앞으로 개인적으로 아쉬운 일들과 포기해야 할 기회들이 많을 텐데, 적어도 나의 나태와 무능을 육아 탓으로 돌리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내가 지금까지 30년 넘게 나만 위해 살았는데 겨우 나 한 몸 밥 굶지 않고 건사하는 정도이지만, 앞으로 나의 가족과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해 살며 더 보람있고 윤택하게 살아가길 바란다.


할 수 있을 거다. 어머니는 위대하다니까.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