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야, 가지 마

이제부터 정말 예뻐해줄 수 있다구..

by Leading Lady

아이를 낳기로는 결정했지만, 여전히 갑작스런 임신에 적응이 되지 않았던 나는 임신한 티를 안 내려고 최대한 애를 썼다. 야근도 굳이 마다하지 않으려 했고, 몸이 잘 안 따라주면 마음으로라도 '나는 괜찮다'며 스스로를 세뇌시켰고, 고통이 찾아오면 잠 속으로 도피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전날 시댁에서 하룻밤을 자고 나온 주말이었다. 점심때 선배의 결혼식에 다녀오면서 나는 뿌리염색이 너무나 하고 싶어, 임신 중 염색해도 되는지에 대해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 보고 친구에게 물어도 보았다. 그렇게 수소문한 결과 염색은 두피로 안좋은 화학물질들이 너무 쉽게 흡수되기 때문에 절대 하면 안 된다는 것이 결론이었다. 나는 체념과 함께 또 한층 기분이 다운되었다. 그래서인지 그날 오후에는 문득 미술관에 갔다. 강행군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기분전환이 필요하기도 했고 왠지 임신한 후 내가 문화생활도 못하고 지내는 것 같은 억울한 느낌에 조금 피곤함을 무릅쓰고 갔다.



그날 저녁, 나는 처음으로 하혈을 했다.


동전보다 좀더 큰 크기의 핏덩어리에 다른 이물질들이 섞여 나오는 것이었다. '이게 뭐지... 혹시 아기집이나 아기가 떨어져 나온 건 아닐까..?!' 변기에 남아 있는 그 핏덩어리를 한참 동안이나 응시하고 관찰했다. 피곤해서 그런 것일 거라고, 괜찮을 거라 생각하려 애썼다. 그런데 그 다음날부터 입덧도 좀 약해진 것 같고 나를 괴롭혔던 임신 증상들이 약간 소강기인 것이었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사람 심리라는 게 참 이상하다. 아이를 갖기 싫어 수술까지 생각했던 게 불과 일주일 전인데, 갑자기 아기가 없어졌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 끔찍하기 그지없다. 갑작스런 후회가 밀려왔다. 혹시 내가 아기를 예뻐하지 않아서, 처음부터 충분히 기뻐해주지 못해서 아기도 그냥 삶을 포기해 버린 것은 아닐까? 엊그제 시댁에 갔을 때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아빠를 닮아) 못생긴 아이가 나오면 어떡하냐고, 아직 나오지도 않은 아기의 생김새를 한탄했던 걸 애기가 들었나 싶기도 했다. 염색 그게 뭐라고.. 못한다고 침울해졌던 내 미운 마음이, 굳이 피곤한 상태에서 미술관까지 가겠다고 했던 의욕이 너무 어리석게 느껴졌다. 나 스스로가 내 몸을 너무 과신하고 혹사시키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오빠는 오빠대로 미안해했다. 임신하고서부터 내가 집안일에 소홀하다고 그저께 내게 항의한 적이 있는데, 그게 미안하다고. 자기가 좀더 하면 되는 걸 나한테 시켰다고 울었다. '임신 초기에 조심해야 한다'는 말이 무엇인지, 대체 어떻게 해야 잘 조심하는 건지, 우리는 그날에야 깨닫게 되었다. 우리 부부는 거의 처음으로 아기한테 말을 걸었다.


"아가야 미안해.. 못생겨도 상관 없으니 건강하게만 나와주렴. 어쩌면 넌 몰랐겠지만, 사실 우리는 널 너무 사랑해. 제발 가지 마.."


신이 우리의 이기심에 대한 벌로 보내주신 생명을 도로 거두어가지 않기를, 그날 우리는 간절히 기도했다.





며칠 후 검사 결과,

...

다행히도 아가는 무사히 잘 자라고 있었다! 심지어 7주차가 되었다고 심장 소리도 처음으로 들었다. 쿠웅쿵쿵 콩콩콩콩 우렁차게 뛰는 심장소리를 듣는 순간 걱정이 씻겨 내려가는 안도감과 동시에 무한한 감사함이 온몸에 퍼져나갔다. 신이 정말 우리 곁에 있었던 게 아닐까. 병실을 나서며 우리는 서로를 껴안고 눈물을 흘렸다. 정말 앞으로는 많이 사랑해 주겠다고 다짐을 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우리 아가는 아주 밀당의 귀재다.


이 작은 생명은 내가 조금만 피곤해하면 바로 반응하고 조금만 자기에게 관심이 없으면 바로 불안하게 하면서 엄마아빠를 들었다 놨다 한다. 아직 콩알만한(1.2cm) 주제에 내 몸을 마구 괴롭혔다가 좀 편하게 해줬다가를 줄타기처럼 왔다갔다 하는 것에 아주 타고난 것 같다. 연애하면서는 전혀 느껴보지 못한 건데, 뭔가 이 밀당에서는 한없는 약자가 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런 불가항력적인 관심과 신경쓰임이 내리사랑과 모성애의 실체가 아닐까 한다.



그래, 우리 앙증맞고 여우같은 콩알 아가야. 내가 더 사랑하는 '약자'로서 더더 많이 사랑해 줄 테니, 앞으로 긴긴 여정 동안 건강하고 착하게, 그리고 조금 욕심을 부리자면 '부모를 고루 닮되 예쁘게' 자라주렴. 만약 이게 너무 큰 욕심이라면 그냥 엄마만 닮아줘도 돼. 아빠한테도 허락을 받았단다. 살아남아 주었더니 너무 바라는게 많지?^^ 미안해ㅋㅋ 그럼 안녕! 잘자!

7주차에, 엄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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