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 남매 장남으로 태어난 규선은 열세 살 나이에 서울로 올라왔다. 아홉 식구 생계를 오롯이 부모님 몫으로 돌리기엔 너무도 가난했다. 6.25 전쟁세대가 그러하듯 일찍이 생계 전선에 뛰어든 자신이 당연하다 생각했다.
종로 3가 세공 공장에 취직한 규선은 잔심부름부터 시작했다. 주문 들어온 물건을 배달하고, 작업 부재자 옮기기는 등 복잡하기 얽힌 종로 3가의 골목길을 하루에도 수백 번씩 뛰어다녔다. 틈틈이 기술자들 어깨너머 기술도 익혔다. 어느덧 반지 하나 번듯하게 만들 수 있을 때쯤 서울에 작은 단칸방 정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영천동에 작은 단칸방을 얻고, 규선은 바로 아래 남동생을 서울로 불렀다.
"서울 올라와라. 형이랑 같이 돈 벌자"
국민학교 중퇴 후, 읍내에서 이런저런 일을 하며 돈을 벌던 규만은 형의 부름에 한달음 서울로 올라왔다. 사실 기다렸다. 이런저런 막노동으로 돈을 버는 것도, 좁은 방에 다닥다닥 붙어 사는 것도 지겨웠다. 서울 가면 모든 것에서 해방될 것 같은 막연한 기분이 들었다.
형 따라 찾은 세공 공장. 규만은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즐거웠다. 힘을 써서 하는 노동이 아닌, 기술로 하는 노동이라는 것도 좋았다. 꿈이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지금부터는 꿈을 가져도 될 것 같았다. 그렇게 규선과 규만은 세공을 하며 돈을 모았고 그렇게 번 돈은 가족들의 생활비로, 동생들의 학비로 쓰였다.
규선은 생각했다. 이렇게 몇 년 더 고생하면, 작은 가게와 공장 정도 운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되면, 시골에 사서는 가족들도 좀 더 여유롭게 살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상황은 그리 쉽게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아머지의 죽음, 무턱대고 동생들과 서울로 올라온 어머니.
두 형제 겨우 누울 수 있는 작은 방한칸에 다시금 모여 사는 여덟 식구.
이 또한 견디어 내는 것이 장남의 일이라면 견뎌야 하겠지만, 가끔씩 미어지는 가슴속 답답함은 어쩔 수 없었다. 장남의 무게도 벅찬데, 아버지의 무게까지 더해야 한다니. 시대가 만들어 놓은 운명이라지만, 견디는 건 규선의 몫이었다. 아마도 이때부터 규선의 모든 말투에 짜증이 묻어나기 시작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