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흰줄박이물돼지 Sep 19. 2020

획일화된 결혼상담

자주 하다 보니 결혼 상담 매뉴얼을 만들었다.

아는 동생들이 많다 보니 결혼 상담을 자주 한다. 대답했던 내용들을 정리해봤다. 다들 비슷한 거 물어봐서 이젠 매뉴얼처럼 대답한다.


1. 결혼하면 뭐가 좋아요?

좋은 것도 있고, 나쁜 것도 있다. 근데 좋다 나쁘다고 얘기하는 건 옳지 않고 그전과 달라진다고 얘기하는 것이 옳다. 어찌 보면 결혼과 자살은 그전까지의 인생을 끝낸다는 점에서 비슷한 부분이 있다. 다른 점은 결혼한 자들은 전생을 그리워할 수 있고 법적인 절차를 통해 환생이 가능하지만 자살은 그게 안된다는 거? 왜 이렇게 극단적으로 얘기하냐면 내가 체감하기에, 결혼이 가져다주는 인생의 변화가 그만큼 막대하기 때문이다.


2. 결혼하기로 결심했던 계기가 있느냐?

연예인들 인터뷰 보면 다들 마법처럼 결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모먼트가 있는데, 그런 건 없었다. 시험 문제의 답이 1번인가 2번인가 고민하다가 1번 찍고 넘어간다 같은 결정이 아니라, 그냥 자연스럽게 이 여자한테 프로포즈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근데 천(天),지(地),인(人)이 모두 알맞은 때를 기다린답시며 동남풍 기다리던 제갈공명 밍기적거리다가 선빵맞음. 굳이 따지자면 선빵 맞았을 때 결혼해야겠다 싶었음.


3. 지금 사귀는 사람이랑 결혼해도 될까요?

네 인생에 나 따위가 뭐 이래라저래라 하겠냐마는... 내가 그런 고민을 다른 사람에게 물어볼 것이었다면 결혼 안 했다. 추호의 의심이 들지 않는 사람이랑 결혼해도 쉽지 않은 생활을 하게 된다. 결혼 전에 너를 고민하게 만들었던 조그만 것들은 점점 커지고 커져서 결혼 후에 너를 크게 후회하게 만들 수도 있다.


4. 그 사람이 제 모자란 부분을 잘 채워주는데요?

결혼해서 나의 부족한 부분을 상대가 채워주고, 상대의 부족한 부분을 내가 채워준다는 개념은 위험하다. 서로 부족한 것들이 있어 상대를 필요로 하게 되는 날들이 지속되다가 나, 또는 상대의 여유가 없어지는 시기에 결핍이 일어나면 무슨 수로 감당할 것인가? 상대방 없어도 사는데 전혀 지장 없는 두 사람이 결혼할 때 제일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5. 그럼 결혼을 왜 해요?

그런 두 사람은 혼자 살아도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지만, 결혼하면 그전까지 몰랐던 행복이 발생한다. 경제학의 비교우위 개념을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듯하다. 상대방과 내가 A~Z까지 모조리 할 수 있지만, 나와 상대가 잘하는 게 조금씩 다를 때와 내가 X, Z를 아예 못하고 상대는 A, B를 아예 못할 때 무조건 서로 채워주어야만 할 때를 비교해보면 조금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그래서 결혼할 준비가 다 되는 때는 역설적으로 결혼하지 않아도 잘 살 수 있게 되는 때라고 생각한다.


6. 형은 어때요? 만족하나요?

만족한다. 결혼하면 새 삶을 사는 것이기 때문에 그전까지의 삶은 전생이라 생각하면 편하다. 전생의 기억들을 잊지 못하고 집착하면 현생이 불행해진다. 물론 전생의 기억들이 자꾸 떠오르는 이유는 현생이 만족스럽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결혼에 대해 좋게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아마 결혼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로 결혼했을 것이다. 아니면 별로 힘든 것도 없으면서 남들이 으레 하는 대로 그냥 징징거리는 것일 수도 있다. 특히 꼰대 문화를 가진 기업에 다니는 사람들은 남자 상사들에게 그런 소리를 하도 들어서 본인도 모르게 오염된 자들이 많았다.


7. 애를 낳으면 어때요?

디아블로 3 똥3 해보았나? 내 경우에는 결혼 이전의 삶이 노멀 난이도라면 결혼하고는 나이트메어 난이도를 겪었다. 플레이가 조금 어려워지는 대신에 좋은 아이템 떨어지고 재미있어졌다. 그런데 육아는 갑자기 헬 건너뛰고 고행 8단쯤 된다. 뒤진다 진짜. 그리고 이때 내가 막 용병린던처럼 따라다니면서 개드립 치고 버프 주고 가끔씩 스턴이나 멕여주는 존재다 싶게 게임하면 망한다. 2인 파티로 생각하고 빡겜 해야 한다. 컨 연습하고, 템 업글하고, 친가와 처가의 쩔도 받아야 한다. 대신 고행 8단이라서 템 좋은 거 떨굼. 어릴 때는 수학여행 가서 제주도 정방폭포만 봐도 자연의 오묘함을 느끼지만, 나이를 먹고선 나이아가라를 봐도 별 감흥이 없어진다. 그러나 부모가 되면 아이가 느끼는 큰 감동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음.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지나치는 것들, 예를 들면 길가에 피어있는 잡초의 새싹이나, 바닥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낙엽들을 애기가 보고 무척 신기하고 행복해할 때가 있다. 그런 아이를 보면 나도 행복하다. 그리고 이 행복이 유니크 아이템이라면 그 아이템을 먹기 위해 겪을 고생은 디아블로 해봤으면 알 것이다. 생각해보니 결혼 생활에 대해 좋게 말하지 않는 부장급 어르신들은 함부로 고행 8단 올라가서 용병처럼 겜하다가 망해서 그런 걸 수도 있겠다.


8. 그럼 현실적으로 결혼이 좋은 점?

현실? 감정을 모조리 배제하고 말하면, 결혼이라는 이벤트는 두 사람, 가능하다면 양가(兩家)의 모든 자원을 합쳐서 크게 한 발 쏠 수 있는 일생일대의 기회다. 그 한 발을 가능한 가장 좋은 자산에 쏴야 한다. 여태까진 부동산이었다. 그리고 10년에 한 번 부부 증여 절세 필살기를 쓸 수 있다. 이건 결혼하고 절세할 일이 생기면 자세히 말해주겠다.

작가의 이전글 꽃, 어디까지 알아보고 오셨어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