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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줄박이물돼지 Sep 13. 2020

꽃, 어디까지 알아보고 오셨어요?

누구나 따라할 수 있는 실전 꽃 구매

꽃을 한 다발 샀다. 마누랭구가 집 근처에 잘하는 꽃집이 있대서 궁금했다. 과연 꽃이 아주 예쁘고 가격도 훌륭했다. 며칠 전 먹은 밀탑 빙수 한 그릇 가격이었다. 아니, 진짜 밀탑 너무 비싼 거 아냐? 만 원이 말이 되냐? 다행히 예전엔 한 사람당 한 그릇씩 먹었는데 이젠 둘이 나눠먹으면 딱 맞더라.


가끔씩 퇴근길에 꽃을 사 오는 남편은 로맨스 소설 또는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훗. 그렇게 꽃 사는 사람 나야 나, 나야 나! 물론 나는 로맨틱과 제법 거리가 멀고 오히려 프래그매틱한 사람이다. 그런데 어떤 과정으로 가끔 꽃 사는 습관을 얻었는지 생각해보니까, 마누라가 받을 때마다 무척이나 좋아한다는 이유도 있지만, 나 스스로 꽃다발 주문하는 걸 좋아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나 스스로 감히 평하자면 예쁜 꽃다발 주문하기로는 경기도권 남자 중 상위 0.1% 안에 든다고 생각한다. 잘하니까 재밌다.


꽃을 고르고 사는 것은 어렵지 않은 데다가 효과도 굉장한데 많은 아재들이 잘 모른다. 동년배들의 복지 및 행복 증진을 위해 꽃 고르는 법을 개한다. 입만 자꾸 털면 신뢰성 떨어지니까 여태 만들었던 꽃다발 포트폴리오를 일부 공개한다.

이 글의 타겟 독자들은 삼십 대 중반 이상의 남자들로, 꽃다발이 예쁜지 안 예쁜지 별로 생각해보지 않았을 사람들이다. 그들은 꽃다발의 아름다움에 큰 차이가 있을 거란 발상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꽃다발을 잘 고르지 못한다. 꽃다발에도 분명한 끕이 있다. 카시오부터 파텍필립까지 다양하다. 누군가 예산 제한 없이 좋은 시계 사는 팁을 물어본다고 하면 다음과 같은 대화가 가능할 것이다.


Q: 좋은 시계 사는 팁 알려주세요.

A: 파텍 필립 사세요.


꽃도 동일하다. 그러므로 꽃다발을 잘 고르기 위한 첫 번째 원칙은 좋은 꽃집을 찾는 것이다. 꽃집마다 가격 차이가 크지 않으므로 잘하면 파텍필립급 꽃다발을 카시오 가격에 살 수 있다. 집 근처에 잘하는 꽃집 하나 뚫으면 가장 좋다. 꽃 가게를 잘 고르는 팁은 별거 없다. 예쁜 가게가 보통 잘한다. 꽃다발 만드는 건 미적 감각에 좌우되는 일이므로 사장님이 인테리어를 예쁘게 한 집에서 예쁜 꽃다발이 나올 가능성을 높다. 만약 실패하면 집에 있는 꽃이 시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른 집을 시도하면 된다. 그럼 집에 꽃 자주 사 가는 남자가 될 수 있다. 개이득.


하지만 단골집 하나 뚫어도 가끔 모종의 사정으로 다른 사람이 가게를 보고 있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 보통 사장님 어머니가 계시다. 어머니의 취향은 부인들의 취향과 또 다르기 때문에 단골집이라고 방심해선 안된다. 하지만 다른 가게를 뚫으러 가긴 귀찮고, 꽃집에 들어간 주제에 어? 사장님이 달라지셨네요? 하고 후퇴하기도 면이 서질 않을 것이다. 우린 샤이한 김치맨 아재니까.


사장님이 바뀌었거나 부득이한 사정으로 단골집에 못 가게 되면 불가피하게 입을 좀 털어야 한다. 먼저, 가격대를 부른다. 1.5만 원으로 할 겁니다. 그러면 그 돈으로는 쬐끄만 꽃다발 밖에 못 만든다고 할 것이다. 물론 괜찮다고 한다. 용돈 받아쓰는 처지에 비싼 꽃다발 사 가면 등짝 맞는다고 말하며 평소에도 꽃을 자주 산다는 점을 어필하자. 리시안서스, 거베라, 폼폼, 유칼립투스 등 남자들이 전혀 모를 것 같은 꽃이나 풀이름을 주워섬기며 요즘 시세를 물어보기도 하자. 너무 뜨내기로 보이면 안 된다. 용산 전자상가라 생각하면 쉽다. 그 다음에는 꽃을 고른다. 아까 시세 물어본 걸로 터무니없이 비싼 애들을 피한다. 걔들은 보통 수입 꽃이다. 꽃다발 만오천원짜리 사는데 만원짜리 꽃 한 송이 들어가면 나머지 채울 게 없잖아. 그 꽃들을 피했으면 다음엔 꽃을 고르는 게 아니라 상대방이 좋아하는 색을 고른다. 모르면 걍 내가 좋아하는 색 고른다. 사는 사람 마음이니까.


농담처럼 용산이랑 비교했는데, 보통 꽃집 사장님들 대부분 친절하기 때문에 꽃 이름 하나하나 물어보면서 친분도 쌓고 미래의 구매를 위한 지식 습득 및 밑밥을 까는 것도 좋다. 다만, 엔간한 미적 감각이 아니면 내가 고른 꽃이 꽃다발이 되었을 때 어떤 모습일지 상상하기 힘들고, 장미처럼 다양한 색을 갖춘 꽃이 드물다. 꽃을 고르다 보면 색을 고르지 못할 수도 있으니 초보 땐 일단 색부터 맞추는 게 안전하다.


마지막으로 풀을 잔뜩 섞어 달라고 한다. 사장님의 도움을 받아 맘에 드는 풀 몇 종류를 고른다. 이 과정이 되게 중요한데, 풀을 섞어야 유니크하고 예쁜 꽃다발이 나온다. 꽃은 원래 풀이랑 같이 사는 애니까. 풀을 섞어줘야 좀 더 부피있고 그럴싸한 꽃다발이 나온다.


이런 식으로 하면 미리 만들어 놓은 꽃다발을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중간에 무례한 사람들이 내 꽃다발 만드는 중인 사장님을 방해하는 일이 꽤 있을 것이다. 그 사람들은 보통 미리 만들어놓은 꽃다발이나 화분을 산답시고 이것저것 물어보며 사장님을 방해한다. 아마 꽃 사다 보면 자주 당하게 되겠지만, 평정심을 유지하자. 사장님도 나같이 까다롭게 구는 사람들 상대하려면 힘드실 텐데, 그 사람들한테라도 비교적 쉽게 돈 버셔야 나한테도 잘해주겠지 생각한다.


이 글을 읽고 집에 꽃을 사 가는 남편이 많아지고 가정에 사랑이 가득하면 좋겠다. 남편 입장에서, 꽃은 스벅 커피 세 잔 가격으로 살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선물이다. 아님 어머니께 선물해도 되겠다. 슬프지만 아버지들이 꽃을 자주 주셨을 리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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