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본 출산기
엄마에게 효도해야만 하는 이유
□월 □일 00:34 딸랭구 탄생. 3.18킬로. 여자아이.
딸랭구야. 네가 스무 살쯤 되는 상상을 한다. 아빠 닮아서 엄마 속을 뒤지게 썩이겠지. 나중에 엄마나 아빠랑 싸우고 방에 틀어박혀 짜증 내기 전에 이 글을 읽어보길 바란다.
□월 ○일 새벽 5시. 진통 걸린 것 같다는 말에 잠이 깼다. 너무 반가웠다. 그 순간을 너무나 기다렸다. 딸랭구가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일 새벽에 유도분만을 예약했는데 다행히 24시간 전에 분만이 시작될 기미가 보인 것이다.
새벽 5시에는 7분에 한 번 고통이 찾아왔다. 6시까지 기다렸다가 출근을 포기했다. 산부인과에서는 진통의 주기가 5분이 되면 분만할 준비가 된 것이라 했다. 금시라도 그 주기가 5분 간격으로 줄어들 것 같았다. 진통이 오는 시간은 십여 초, 기다리는 시간은 7분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다시 잠들었다. 우리는 전날 밤에도 근처에 있는 대학교에 다녀왔다. 2시간 정도의 산책 코스였다. 지난 3주 동안 우리의 주말은 계속 산책이었다. 3주 전 태동 검사에서 미약하지만 규칙적인 진통이 측정된 이후 우리의 매일은 항상 대기 상태였고, 할 수 있는 건 오직 산책뿐이었다. 기약 없이 기다리던 3주는 사람을 지치게 했다. 우리는 마지막 기다림을 맞이하여 그동안 지쳤던 마음을 잠으로 풀었다.
진통에 대한 얘기를 조금 더 해야겠다. 흔히들 진통에 걸린다고 표현하지만 사실은 분만 전 규칙적 자궁 수축이 옳다. 왜냐하면 자궁 수축은 산달이 되면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며 항상 진통을 동반한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던 그 진통들도 가볍지 않았지만, 분만에 앞서 찾아온 진통은 그야말로 수준이 달랐다. 마누라는 그 고통을 일컬어 배 위로 트럭이 지나가는 기분으로, 온 세상에 수축하는 본인의 자궁과 고통만 남겨진 기분이라고 표현했다.
안타깝게도 오후 1시가 되도록 그 주기는 7분이었다. 마누라는 7분에 한 번씩 트럭에 깔리는 기분을 느끼면서도 그 고통이 제발 좀 더 자주 찾아오길 바랐다. 아픈 건 싫지만 자주 아프길 바라는 모순이었다. 결국 진통이 오기 시작한지 8시간이 넘어서 병원에 갔다. 막연하게 견디기에는 우린 너무 지쳐있었다. 이 주기가 언제 5분으로 줄어드는지, 줄어들긴 하는 건지 알아야 했다. 병원에 갔다가 다시 돌아올 각오를 하고 우린 병원으로 떠났다. 만약 오늘 나오지 않으면 저번에 맛있게 먹었던 차돌백이 짬뽕을 한 번 더 먹으리라 다짐했다.
진통 주기가 잦지 않았기 때문에 분만실로 바로 가지 않고 일반 진료를 접수하고 기다렸다. 평일 점심시간 직후라 사람이 많지 않아서 태동검사 후에 바로 의사를 만났다. 내진 결과 자궁 경부는 2cm가 열려 있었다. 입원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수준이라 했다. 집에 가서 기다리다가 어찌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일단 입원하기로 했다. 아쉽게도 1인실이 없어서 2인실에 들어갔다. 1인실의 추가 비용은 16만원, 2인실의 추가 비용은 10만원이었다.
입원은 했지만 병실이 아니라 자유 진통실이라 이름 붙은 곳으로 갔다. 마누라를 검사에 보내고 자유 진통실에 있었다. 산모들의 고통과 남편들의 당혹감이 넘치는 곳이었다. 무섭고 불편했다. 내 옆 사람은 땀을 뻘뻘 흘리며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녀의 남편은 어쩔 줄 몰라했지만 무엇을 해줘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누라가 있는 A번 칸에서 나를 불렀다. 각 칸은 커튼으로 구분되어 있었고 침대, 보조 의자, 그리고 태동 검사 장비가 하나씩 있었다. 고통스러운 신음이 옆 칸에 있는 산모의 존재를 알렸다. 그녀의 신음 한 번에 우리 심장도 오그라들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산모는 아직 자궁경부가 열리지도 않은 상태였다. 진통이 심한데, 자궁경부가 열리지 않은 경우는 유도분만제를 맞은 경우라고 했다. 유도분만제는 옥시토신 호르몬을 이용해서 인공적으로 자궁수축을 만든다. 안타깝게도 옥시토신이 자궁 경부를 열어주진 않는다.
자유 진통실에 있던 다섯 명의 산모 중 세 명이 유도분만제를 맞은 상태였다. 그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심하게 고통을 호소했지만 자궁 경부는 많이 열리지 않았다. 케첩을 아무리 쥐어짜도 뚜껑이 닫혀 있으면 케첩이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정말 케첩이라면 뚜껑이 열릴 때까지 더 세게 쥐어짤 수 있었겠지만 사람에게는 사용할 수 없는 방법이다. 그 고통을 끝내는 방법은 제왕절개뿐이었다. 결국 세 명 모두 수술실로 들어갔다. 아내가 수술실로 들어가고 남겨진 남편은 자유 진통실에서 울었다.
마누라는 제왕절개 수술을 무서워했다. 사람들은 흔히 그 수술을 ‘제왕’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 본질은 ‘절개’에 있다. 아이 머리가 통과할 수 있도록 10cm를 절개하는 수술이다.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누군가 내 배를 10cm 가른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무서운가? 심지어 요즘은 하반신 마취만으로 제왕절개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므로 누군가 내 배를 가르는 걸 느낄 수 있다. 어느 쪽이든 마누라의 두려움이 이해되었다. 하지만 아까 수술실로 들어간 산모들만큼 고통스러워한다면 마누라가 무서워하더라도 제왕절개를 요청하리라 마음먹었다.
침대에 누워있을 때는 태동 검사를 했고 나머지 시간은 자유 진통실에서 보냈다. 자유 진통실에서는 주로 운동이나 마사지를 했다. 부부 감동 터치라는 수업을 들었던 것이 다소 도움이 되었다. 자유 진통실에 있을 때는 도플러 3번 기계를 이용해서 한 시간에 한 번씩 딸랭구의 심장 소리를 확인했다. 딸랭구는 좁은 뱃속에서도 잘 도망다녔다. 도플러 기계를 쓰는 사람은 근처의 여대에서 나온 실습생이었다. 딸랭구가 도망 다닐 때마다 긴장했고 제대로 확인되지 않을 까봐 벌벌 떨었다.
6시 반쯤 무통분만 시술을 하기로 했다. 무통분만은 척추에 구멍을 낸 다음 신경을 무디게 하는 약물을 넣어서 고통을 경감하는 시술이다. 진통이 심해졌을 때 바로 맞을 수 있도록 링거를 맞을 때처럼 주삿바늘을 찔러두는 시술을 한다. 예상보다 대기 시간이 너무 길어져서 확인해보니, 앞사람이 시술 중이며 수술 중간에 들어가서 오래 걸린다고 했다. 결국 7시에 들어갔다. 시술실에 마누라가 혼자 들어가는 것이 무척 걱정되었다. 앞에서 얼쩡거리고 있었더니 자유 진통실에서 대기해달라고 했다.
분만실에는 산모와 아기의 상태를 간략하게 표시한 차트가 붙어있었다. 차트에 있는 각 기호와 숫자가 의미하는 바를 물었다. 자궁경부가 열린 정도는 Cm로 표현되고 아이의 머리 높이는 +로 표현된다. 이 둘을 고려한 분만 진행도는 %로 표현되는데 어떤 공식이 있는 건 아니고 표기하는 사람의 자의적인 판단에 의해 정해지는 느낌이었다. 아이 머리 높이가 0이 되면 머리가 자궁경부에 닿아 있는 것이고 10cm가 되면 경부가 완전히 열려서 본격적인 분만이 시작된다는 것이었다. 차트에 쓰인 수치들은 우리가 몇 시간이 지났는데도 좀처럼 변하지 않았다.
마누라가 무통 시술을 받고 나왔다. 허리에 주사를 박았지만 진통 때문에 허리에 그 무엇도 느낄 수 없다고 했다. 우린 다시 자유 진통실에서 조금씩 걷거나 블루스를 추듯 움직이며 대기했다. 하지만 진통이 점점 심해져 견디기 힘든 상태가 되었다. 무통 주사는 감각을 무디게 만들기 때문에 자궁경부가 일정 이상 열려야 놓아준다. 그전에 놓으면 제왕 절개할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했다. 하지만 고통이 너무 심해졌기 때문에 자궁 경부가 얼마나 열렸던 무통 주사를 놓아 달라고 요청하기로 결심했다.
우리는 자유 진통실을 나섰다. 마침 태동 검사할 타이밍이었다. 태동검사를 하는 동안 화장실에 잠깐 다녀왔다. 그사이에 내진이 있었다. 마누라가 울고 있었다. 자궁경부는 여전히 2센티 열린 상태였다. 병원에 도착해서 여섯 시간 동안 아픔을 참았지만 수치상으로 나타나는 어떠한 변화도 없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의사에게 자궁 경부 열림을 촉진할 방법이 없는지 물었다. 인위적으로 양수를 터트리면 도움이 된다고 했으나 아직은 너무 이르다고 했다. 고통이 언제까지 지속할지 모른다는 사실이 우리를 가장 힘들게 했다. 내진의 영향인지, 진통이 좀 더 강해졌고 마누라는 몸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무통 주사는 여전히 맞지 못했다.
자궁 수축을 측정하는 기계가 있다. 마누라는 표시되는 수치가 100에 가까워질 때마다 온몸을 조였다. 중간중간 수치가 낮아지는 틈을 타서 제왕절개에 대해 얘기했다. 더 이상 견딜 수 없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간호사를 불렀다. 경부가 얼마 열렸든 무통을 맞고 그게 통하지 않으면 제왕절개 하기로 내심 마음을 정했다.
간호사들이 야간 교대 조로 바뀐 모양이었다. 아까까지 못 보던 인상이 또렷한 간호사가 왔다. 분만실의 산모들이 눈물과 고통으로 얼룩진 축축하고 희미한 세상을 보는 와중에, 갓 교대해서 들어온 그녀는 인상만큼이나 건조하고 단호했다. 거침없는 손길로 내진을 했다. 경부가 조금 더 열렸다고 했다. 2.5에서 3센티라고 했다. 0.5 정도는 손가락으로 측정 가능한 크기가 아닌 것 같았다. 괜한 희망을 주려는 게 아닌가 다소 의심했지만 무통 주사를 놓아주기로 했기 때문에 의심을 묻어두었다. 그래도 여전히 아팠고, 약 기운이 도는 데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간호사가 마누라의 자세를 교정해주더니 오일을 가져와서 배 마사지를 했다. 무자비한 마사지였다. 지난 40주 동안 터지기 쉬운 풍선처럼 애지중지 다루던 배를 빵 반죽처럼 치댔다. 마누라는 엄청나게 아파 보였지만 끝나고 나니 오히려 나아졌다고 했다. 간호사는 힘이 드는지 내게 오일을 주고 해보라고 했다. 오일을 침대에 온통 흘렸다. 간호사가 째려보았다. 그러게 왜 나한테 시켰냐? 나는 몹시 긴장해 있었고, 밥도 못 먹었고, 본래 손놀림이 야무지지 못하다. 내 마사지는 간호사보다 너무 약했다. 손끝에 느껴지는 배 근육이 딱딱했다. 반복되는 수축이 근육을 뭉쳐놓은 모양이었다. 내 손길은 약하고 어설펐지만 그래도 뭉친 근육이 조금은 풀어졌다.
다음 진행된 내진에선 4cm 정도 경부가 열렸고 분만을 촉진하기 위해 양수를 터트렸다. 한참 2cm에서 머물던 딸랭구가 본격적으로 내려오는 모양이었다. 학교 후배의 출산기에서 자궁경부가 열리기 시작할 때까지 8시간, 다 열릴 때까지 2시간, 분만에 2시간이 소요되었다고 했다. 병원 도착 이후 대략 8시간 정도 끝에 경부가 본격적으로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 과정은 정말 지겹고 고통스럽고 기약 없는 시간이었다. 3cm가 열린 채로 와서 우리의 부러움을 샀던 옆자리 산모는 여전히 3cm가 열려있었다.
분만이 급격히 진행되는 영향인지 무통 주사의 효력이 조금 떨어지는 것 같았다. 다행히 아까 오일 마사지하기 전보다는 낫다고 했다. 우리는 운이 없는 케이스였다. 무통주사의 효력을 보아야 할 시기에 수축이 급격히 강해진 바람에 대부분 시간을 무통 주사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 간호사들은 계속 딸랭구의 활동성을 점검하고 진동기를 이용해서 애를 깨웠다. 활동성이 낮으면 자궁경부에 머리가 낄 수도 있기 때문에 계속 깨워야 한다고 했다.
경부가 대부분 열리고 가족 분만실로 들어갔다. 우리가 한참 진통하고 있을 때 가족 분만실에 들어갔던 사람이 있는데 30분 만에 애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경산부라고 했다. 그분이 휠체어를 타고 나오는 걸 보며 이 잔의 술이 식기 전 적장의 머리를 베어오겠다고 말하던 관우가 생각났다. 우리도 그 거침없는 씩씩함을 이어받아 분만실에서 30분 만에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가족 분만실 문에는 딸랭구라고 쓰여 있었다. 병실이 아니라 객실처럼 꾸며둔 곳이었다. 병실보다 편안한 느낌을 주는 곳이었지만 이 곳을 이용하는 데 추가 비용이 든다. 이래저래 다 장삿속이구나 싶었다. 들어가서는 '런지'운동을 시켰다. 일반 사람이 하는 런지 운동과 매우 다르다. 마누라가 침대에 한쪽 다리를 올리고 있으면 내가 마누라의 뒤에서 배를 껴안고 아래에서 위로 힘껏 들어 올린다. 그 상태에서 카운트 10을 센다. 기도가 막혔을 때 시행하는 응급처치(하임리히법)와 비슷하다. 얼마 전 예비군에서 배웠는데 여기서 바로 비슷한 동작을 할 줄은 몰랐다. 정말 죽을 만큼 아파 보였지만 마누라는 잘 견뎠다. 나는 마치 바둑티비에서 계시원이 초읽기하듯 숫자를 셌다. 기계적으로 숫자를 세지 않으면 정신적으로 버티기 힘든 일이었다. 10초 하고 잠시 쉬고 다시 10초, 그리고 다시 10초 3세트를 반복했다.
10분 정도 하고 너무 고통스러워했기에 간호사를 부르러 갔다. 김치 냄새가 났다. 다들 밥을 먹고 있었다. 산모는 죽을 것 같은 고통을 넘나들고 있는데 이들은 직업이라 아무 느낌도 없는 것 같아서 묘했다. 간호사는 급할 것 없다는 태도였다. 런지 운동을 조금 더 하라고 했다. 세상에... 이 짓을 더 한단 말인가?라고 말한 나에게 직업이 시인이냐고 물었다. 재밌어하는 눈치였다. 다행히 마누라도 그 아픈 와중에도 재밌어했다.
물리적으로 아이를 내리는 런지는 효과적이었다. 아이가 다 내려왔다. 마누라는 침대로 올라갔다. 침대 옆에 달린 보조 기구로 발을 지탱하면서 마치 스쿼트 하듯 아이를 밀어냈다. 거의 나오기 직전이었다. 간호사가 서류를 하나 내밀었다. 회음부 열상 주사 관련 서류였다. 아이가 나오면서 회음부가 찢어지는데, 그 정도를 줄여준다는 주사였다. 추가 비용이 들어가기 때문에 보호자 사인이 필요하단다. 그걸 왜 이 시점에 내미는 걸까? 몹시 화가 났다. 미리 설명하고 내밀었어도 싸인했을텐데. 출산이 아무리 장사가 되어도 그렇지 이건 상도덕에 어긋난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라마에서 보던 힘주는 시간이었다. 의사는 분만 직전에야 왔다. 골반이 좋고 어쩌고 하면서 응원했다. 마누라에게 잘 들렸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마누라의 배를 심폐소생술 하듯 꾹꾹 눌렀다. 티비에서는 남편도 옆에서 응원을 하거나 머리채 잡히는 걸 피해 다니던데, 이놈의 병원은 본인들이 해야 할 일을 내게 시키는 기분이었다. 분만도 병원에서 진행되는 바, 일종의 의료 행위라고 할 수 있는데 의사 면허는커녕 운전면허 필기시험 낙방 1회 기록이 있는 나에게 간단한 설명만 해주고 중요한 일을 맡기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길었던 고통과 인내의 시간이 끝나고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마누라는 출산 계획서에 태맥이 멈출 때까지 탯줄을 자르지 말아달라고 했다. 제대혈을 채취하지 않을 예정이었기에, 태반에 남아있는 좋은 성분들이 조금이라도 더 아이에게 갔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하지만 그 과정이 제대로 되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당황했기 때문에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다. 아이가 태어나서 마누라의 고통이 멎은 것 같아 너무 다행이었다. 나는 내 스스로 냉정을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정신이 없었다. 보통 남편이 세레모니처럼 자르는 탯줄은 무척 질겨서 단단한 느낌마저 들었다. 아이의 발가락 개수와 손가락 개수를 확인했다. 이상 없었다. 00시 34분이었다.
아이는 처음에만 울었다. 우리가 말을 걸자 울음을 뚝 그쳤는데, 뱃속에서 듣던 엄마와 아빠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아이는 눈을 뜨고 우릴 보려고 했다. 간호사가 아이 사진을 찍으라 권했다. 그제야 정신 차리고 사진을 찍었다.
아이는 피와 양수를 닦은 다음 천에 쌓인 채 엄마에게 인도되었다. 맨살 캥거루 케어를 그리도 강조하더니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양수에 쌓여있다 나온 아이와 산모의 맨살이 닿기 위해서는 번거로운 절차가 많았고 체온 저하도 걱정해야 했다. 맨살 접촉은 포기했다.
모녀의 첫 만남. 우리 마누라는 아이를 보자마자 너무 예쁘다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이 정말 충격이었다. 쭈글쭈글하지 않아서 갓 태어난 것치고 못난 편은 아니었지만, 예쁘다고는 절대 볼 수 없었다. 아이를 낳느라 새벽 5시부터 다음 날 새벽 12시 30분까지 20시간쯤 진통하던 사람의 첫 대사는 '너 낳느라 아파서 죽을 뻔했다'가 될 줄 알았다. 위대한 모성애를 보았다.
난 여전히 냉정한 척하는 당황 상태였기에, 조리원에 전화한답시고 분만실을 나왔다. 남편은 애를 낳자마자 조리원에 전화해서 방을 잡아놔야 한다는 조언을 잊지 않기 위해서였다. 지금 생각하면 멍청한 짓이다. 새벽 1시에 나 말고 누가 전화를 하겠으며, 그 조리원을 이용하는 대부분의 사람이 이 병원에서 분만한다는 걸 생각하면, 우리 말고 분만한 사람이 없는 때 누가 전화를 한단 말인가. 아무튼 난 멍청하게도 우리 딸과 첫 만남의 여운을 즐길 기회를 조리원에 전화하면서 날려 먹었다. 조리원에 전화하고 나서는 후처리 한답시고 못 들어오게 했다.
낮과는 다르게 아무도 없는 자유 진통실에 홀로 앉았다. 마누라가 대견스러워 조금 눈물이 났다.
딸랭구, 다 읽었니? 결론은 오직 하나다. 엄마에게 효도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