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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줄박이물돼지 Nov 17. 2020

딸랭구 키우기 #25

북부로 캠핑

말로만 듣던 파주에 갔다. 9월에는 겨울 같은 가을이 오고, 11월부터는 참 겨울이 온다는 곳. 장벽 너머로 사회주의 락원을 관찰할 수 있다는 곳이다. 처남 부부도 오고 어머니 아버지도 다 오신다고 하셔서 자유시간 좀 확보할 수 있을지 아주 설렜다. 두 시쯤까지 딸랭구랑 놀아주다가 근처에 사는 학교 후배님을 뵙고 놀겠다는 원대한 꿈을 꾸었다.


처남네 부부는 부지런하고 놀고먹는 데 항상 진심이다. 그 친구들은 아침 일찍 출발해서 칼국수도 포장 주문하고, 정육점 가서 고기 사고, 캠핑하는 곳에 가서 조명, 의자, 식기 등등을 모조리 준비했다. 우리 부부는 아침에 좀 늦게 일어난 주제에 살짝 여유 부렸고, 딸랭구는 생떼 부렸다. 어마어마하게 지랄이 나서 도저히 출발할 수 없었다. 본인이 신발 제일 먼저 신어야 하고, 엄마 아빠가 먼저 신발 신으면 절대로 안 될 뿐 아니라 본인 신발 신는 곳 근처에 가기만 해도 경기를 일으키며 오지 말라고 울어재꼈다. 우리보다 먼저 신발을 신고 1등으로 현관에 나왔다는 승리감을 맛보고 싶은 건 이해한다. 그런데 우리가 준비할 동안 장난감 가지고 놀고, 얼른 나오라는 말도 안 듣다가, 신발 신을 때마저 집중하지도 않고 왔다 갔다 늑장 부리면서 제 맘대로 하는 꼴을 봐줄 수는 없었다. 요새 1등하고 본인이 이기는 거 너무 좋아하는데, 본인이 무언가 열심히 해서 이길 생각은 전혀 없고 이길 수 있게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짜증 낸다. 예를 들어 가위바위보를 한다면 본인이 가위, 내가 보를 내도록 정한다. 그런데 내가 바위 내서 이기면 지가 이겨야 됐다고 짜증 내거나, 가위가 이겼다고 박박 우긴다. 애기니까 그렇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지맘대로 되는 게 극히 적은 세상에서 지맘대로 안될 때마다 짜증 부리는 게 걱정이다. 시합에서 1등을 하고 싶으면 노력을 해야지, 본인 말고 나머지를 다 기권시켜서 1등 하고 싶어 한다. 승리의 기쁨은 정정당당한 경쟁의 결과에서만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방에 끌고 들어가서 혼내느라 시간이 좀 더 지났고, 파주에는 12시가 넘어서 도착했다.


캠핑장은 옳은 휴식이라는 곳이었다. 판자마다 각기 다른 빛깔로 바랜 나무 오두막이 아주 예뻤는데, 날씨마저 좋았다. 주차하다가 살짝 긴장을 풀어서 사고 날 뻔했다. 주차를 두 군데 할 수 있는데, 하나는 바로 길에 면해 있어서 교통량이 아주 적을 때를 노려야 할 듯하고, 논 쪽 골목으로 들어와서 주차하면 좀 멀어져도 안전하다. 내가 도착할 때쯤에도 가벼운 접촉사고 사고 때문에 보험사 차량 오고 난리였다.

사진과 같은 오두막들은 모두 독채인데, 우리는 건물 2층을 배정받았다. 이곳은 숙박이 안 되는 캠핑장임에도 인기가 아주 좋아서 예약이 열리자마자 꽉 찬단다. 우린 뒤늦게 예약했는데 운이 좋아서 취소분을 건진듯하다. 2층은 전망이 좋은 대신 바베큐 장을 옆집이랑 같이 써야 한다. 어머니 아버지께서 코로나에 좀 민감하셔서 걱정했는데, 다행히 옆집 사람들이 거의 밖으로 나오지 않았고, 바베큐 시간도 달랐고, 심지어 집에도 일찍 가버리는 바람에 괜찮았다.


도착하자마자 바베큐를 해 먹었는데, 처남님이 준비부터 조리까지 아주 고생하셨다. 난 아침부터 딸랭구랑 싸우고, 2시간 넘게 운전하고, 도착해서 사고도 날 뻔해서 잠시 뻗어있다가 고기 다 구워진 다음 나가서 밥벌레처럼 와구와구 먹었다. 너무너무 맛있었다. 바삭바삭하게 구운 립도 먹고, 바삭촉촉한 목살이랑 삼겹살도 먹고, 소시지도 먹고, 버섯, 고구마, 감자도 먹었다. 밥이랑 물까지 합쳐서 한 2킬로 정도 먹었지 싶다. 밥벌레 행세를 한 게 미안해서, 밥 다 먹고 딸랭구를 데리고 나갔다. 오두막 쪽을 슬쩍 산책하고 논에 가서 미꾸라지 잡자고 꼬셨다. 막상 가보니 미꾸라지 잡기는 불가능했다. 대신 개구리도 있고 메뚜기도 있고 잠자리도 있어서 쫓아다녔다. 딸랭구는 나의 독려 아래 섬서구메뚜기를 스스로 잡았다. 지금까진 내가 잡아준 걸 만지게 해 주거나, 딸랭구가 잡기 좋은 위치에 떨어트려 줬는데, 이번엔 야생의 메뚜기를 혼자 잡았다. 약간 비실한 녀석이긴 했지만 분명한 성취였다. 꽤 기뻐했다. 그렇게 놀다 보니 논 주변에 아주 조그만 모기들이 잔뜩 있다는 사실을 나중에서야 깨달았다. 너무 작아서 잘 보이지도 않았다. 이 악랄한 흡혈귀 놈들은 피부가 거친 내게는 단 한 마리도 달려들지 않았다. 야들야들한 우리 딸랭구만 두 방이나 물렸다. 엉덩이랑 팔뚝에 물렸는데 엄청 부었다. 애기라서 그런지 모기에 물리면 크게 붓는다. 내가 잘 챙기지 못해서 물린 것 같아 너무 미안했다. 간지럽다고 울상인 랭구를 데리고 숙소로 돌아가면서 잠자리를 잡아먹는 사마귀를 라이브로 보다가, 섬서구메뚜기 한 번 놓쳤다. 메뚜기들은 잡혀있으면 입에서 고약한 냄새가 나는 갈색 액체를 토하는데 딸랭구가 그거 보더니 메뚜기가 똥 싸! 이러고 놓아버렸다. 다시 찾아내서 잡을 수 있게 해 주고 캠핑장으로 걸어갔다. 엄청 시골길인데도 은근히 차가 다녔다. 큰 트럭을 피하기 위해 버려진 농기구 옆에서 잠깐 서있었는데 거기서 쌍살벌 벌집을 봤다. 대충 봐도 벌 30마리 이상의 상당한 규모였다. 딸랭구는 무서워하면서도 열심히 봤다. 도착해서는 잡아온 메뚜기를 열심히 자랑하면서 메뚜기가 아파서 엑, 토했다고 얘기했다. 딸랭구는 어릴 때부터 그냥 토한다고 얘기하지 않고 엑, 토한다고 얘기한다. 의성어를 항상 붙이는 게 귀엽다. 메뚜기 자랑 끝나고는 모기 물린 데 간지러워해서 바셀린 좀 발라주고 낮잠을 재우려고 시도했다. 분명 둘이 같이 누웠고, 둘 다 피곤해했는데, 나는 못 일어나고 딸랭구는 일어났다. 딸랭구는 날 버리고 나가서 놀고 난 그대로 뻗어서 잤다.


자는 동안 증권사 녀석들이 전화했었지만, 알아채지 못했다. 일어나 보니 전화를 안 받아서 요청을 자동 취소한다는 문자가 와 있었다. 요새 증권사랑 엮여서 뭐 한 번에 되는 일이 없다. 계획이 망가졌다. 엷게 짜증이 났지만, 바깥에 나간 순간 기분이 좋아졌다. 가족들 모두 기분 좋게 앉아서 조금씩 그늘져가는 하늘을 보고 있었다. 나도 얼른 마누랭구 옆에 한 다리 끼여 앉았다. 딸랭구는 처남 부부가 생일 선물로 준 뽀로로 노래방 기계를 갖고 노는데 여념이 없었고 우리는 블루투스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햇살의 흔적이 점점 진해지는 하늘을 보았다.

마누랭구랑 둘이 노을 지는 오두막 풍경을 좀 즐겨볼랬는데 딸랭구가 득달같이 따라와서 같이 좀 놀았다. 캠핑장 내 놀이터를 뒤늦게 발견했는데 규모가 크지 않았고 날이 어두워져서 긴 시간 놀지는 못했다. 고 짧은 시간 동안 처남네 부부가 잠깐 자고 일어났다. 아침부터 엄청 피곤했을 것이다. 이쁜 동생들이다.


저녁에는 포장해 온 칼국수를 먹었다. 바지락과 닭으로 국물을 낸 진한 친구였다. 칼국수 별로 안 좋아하는 나도 무척 맛있게 먹었다. 우리 동네 Gleam에서 사 온 자몽 케이크로 딸랭구와 처남 댁의 생일 파티도 했다. 그 집에선 딸기 케잌만 먹어봤는데 자몽 케잌도 좋았다. 에쉬레 버터로 크로아상 하는 집은 역시 다르군. 그 집은 평일 아침부터 주차장이 만차였다. 커피와 빵이 모두 맛있고 테라스 자리가 있어서 부지런한 한량들에게 각광받을 수밖에 없다. 이제 보니 먹은 게 다 맛있어서 살이 쪘구나. 너무 재미있었으니 착한 살 인정한다. 우리는 갈 길이 좀 멀고 딸랭구도 재워야 해서 마지막으로 가족사진 찍고 일찍 출발했다. 딸랭구는 요새 차에서 애청하시는 검은 고양이 네로 1절 끝나기 전에 잠드셔서 도착할 때까지 주무셨다. 나랑 마누랭구는 넘모 재밌던 와중에 준비하느라 고생한 처남 네 부부에게 고맙고 미안했다. 처남이 아버지께 비용 정산해서 청구하는 단체방 카톡을 보자마자 모른 척 같은 금액을 계좌에 찔러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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