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의 법칙 그리고 슬럼프

by 익호

무엇이든 두 달쯤 지속할 수 있으면 습관으로 자리잡는다는데, 그 시기를 훌쩍 지났지만 여전히 건반 앞에 앉을 때마다 새롭고 어색하다.


지난 두 달간의 결산을 해 보자면:

원전판 바이엘 중 105곡을 차근히 각개격파함(마지막 반음계 딱 한 곡은 도중에 항복)

체르니 100 연습곡집 초반부를 더듬거리는 중.

하농 속주에 재미를 붙이고 있음.


배우는 속도만 놓고 보자면 순항중이다. 합격 안정권.


그러나 진도를 빼는 것과는 별개로, 실력이 늘고 있다는 느낌은 솔직히 들지 않는다. 성장한다는 게 과연 어떤 감각인지조차 모르는 상태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할지 모른다.

한창 행복한 초보 시기를 보내는 중이라 그렇겠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조차 구별하지 못하는 백지 상태. 혹은 그저 주어진 단순한 과제를 하나씩 덧그리기만 하면 그만인 때. 지난 두달간이 내게 딱 그러한 행복의 시절이 아니었나 싶다.

문제는 이 다음부터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모호했던 경계가 점점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 내가 무엇을 얼마나 모르는지 그 정량적 수치를 얼추 가늠하게 되는 시기가 오면, 배움은 곧 그 본래의 모습인 고통이라는 엄격한 얼굴을 내밀 것이다.

그리고 그 첫 벽은 그리 멀리 있지 않았다. 새로운 교재 체르니 100을 통해 이미 뚜렷이 느끼고 있다.


체르니 100. 어려운 교재다. 나 같은 초보자에겐 리딩조차 간단하지 않을 만큼. 한 곡당 익혀야 할 테크닉은 한두 가지로 압축되어 있다지만, 웬만큼 설렁설렁 임해서는 소화하기 힘들게끔 설계되어 있다. 그저 음표만 더듬어 따라 치는 현 단계에서도 이 곡들이 허투루 쓰인 게 아니라는 걸 여실히 느낀다.

예컨대 7번 곡. 오른손 6도가 연속해서 등장하는 이 곡은 주어진 손가락 번호를 지키려 애쓰다 보면 머릿속이 금세 과부하에 빠지고 만다.

또, 22번 곡. 셋잇단음표가 이어지는 왼손에 오른손 8분음표 두 개를 맞춰 넣는 타이밍은 감각적으로는 따라 칠 수야 있지만, 명료하게 이해했다고 자신 있게 말하긴 힘들다.

그밖에 척 보기에 간단한 악보여도 직접 손을 대면 버벅이기 십상인 경우가 많다. 아니, 사실 거의 대부분의 곡이 그렇다. 납득할 만큼 깔끔하게 쳐내지 못한 부분을 남긴 채로 넘어가야 할 때의 기분이란. ‘뒤가 켕기는’ 경험이 쌓이고 쌓인 어느 순간, 애꿎은 건반에다 대고 버럭 성을 내는 내가 있었다. 이어지는 적막감 속에 곧 웃음을 터트렸지만.


체르니가 재미있다는 이야기를 여태껏 들어본 적 없는 이유가 이런 거였나?

체르니의 에튀드는 혹자가 말하듯 음악성이 부족하기 때문에, 또는 구닥다리이기 때문에 기피되는 교재일 거라 생각했었다. 그게 최근엔 단순히 ‘어려워서’ 외면받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바뀌고 있다.

좀처럼 나아질 기색 없이 자꾸만 삐그덕대는 상황. 특히 그것이 의도된 것이라면 쉬이 마음이 꺾이지 않을 사람이 이 세상에 얼마나 있을까.

혹시 당신이 그런 사람이라면, 경의를 표한다. 그대는 피아노가 아니라 어떤 분야에서든 성공할 가능성이 높거나, 이미 성공을 이루신 분이리라.

아쉽게도 나는 실패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부류의 인간으로 성장하지는 못했다. 고통의 순간을 잘 참고 견뎌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내야만 한 단계 높은 곳에 도달할 수 있다는 고금의 진리. 인생을 관통하는 한줄일 테지만,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인가.

취미로 독학하는 내겐 곁에 붙어 강제성을 부여하는 장치도 사람도 없기에, 더욱더 마주친 난관을 넘어서기 쉽지 않다. 사실, 지금 수준에서 난관을 난관으로 인식했다는 것만으로도 칭찬받아야 할 일일지 모른다.


또다시 장황하게 풀어내긴 했지만, 결론은 이렇다.

연습하기 너무 싫다. 겨우 두 달 남짓한 벌써부터.

66일의 법칙. 그것은 악기 연주같은 복합적인 영역에서는, 특히 독학에서는 거의 소용 없을 만큼 짧은 기간이었던 것이다.


악기를 독학한다는 게 애초에 무모한 시도였을까. 완전히 길을 잃어버리기 전에 레슨이나 학원을 알아보는 게 맞는 걸까.

배움이란 모름지기 그 분야의 전문가를 통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고, 세상 일은 기이하게도 공으로 얻은 건 공으로 흩어져버리는 경우가 많은 법. 기껏해야 유튜브나 기웃거리며 주워 먹은 지식들이란 실전 무대에 오를 일은 애초에 요연하고, 그저 건반 위의 ‘여흥’으로만 몇 차례 채용되는 게 고작이다. 그마저도 몇 밤 자고 일어나면 머릿속에서 깔끔히 지워질 운명이고.


평생의 취미로 삼겠다고 호언했다면, 한 번쯤 돈을 들여 제대로 배워 보는 것이 이치에 맞을 것이다.

개인 레슨을 받는다면 피아노 전공자인 지인에게 부탁해 보는 게 가장 빠르고 확실할 듯하다. 비용 부담과 시간 조율이 가장 큰 걸림돌이다.

학원은 어떨까. 주먹구구식으로 때려 넣는 지금보다야 훨씬 효율적이겠지만, 동네 꼬마들 사이에서 성인 남성이라는 내 포지션이 어쩐지 마음에 걸린다.

성인 전용 피아노 학원은? 누군가가 친목회 혹은 술판으로 변질되기 십상이라는 소문을 전달해 준 적이 있어서 선뜻 마음이 가질 않는다.

최근엔 피아노 학습용 앱도 제법 정교한 경험을 제공한다고 들었다. 기술의 발전에 기대어 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만, 과연 사람의 손길과 귀를 완전히 대체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이렇게 첫 교재 선택에 이어 금방 또 고민의 늪에 빠지고 말았다.

무엇을 선택하든, 혹은 선택하지 않든 전보단 진지하게 앞을 설계해 보아야 할 시기인 것만은 확실한 듯하다.

이것도 일종의 슬럼프라고 할 수 있으려나. 언젠가는 반드시 거쳐야 할 시기겠지만, 이렇게나 일찍 찾아올 줄은 몰랐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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