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크뮐러 25 연습곡에 대한 단상
짧았던 학원 시절 경험해 본 교재 중에서 바이엘은 아직 증발하지 않고 남아있던 감각에 의지해 전곡을 대강 선방했지만, 후속 교재로 택한 체르니 100은 밑천이 바닥난 까닭인지 지지부진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첫 좌절 혹은 슬럼프라고 거창하게 이름까지 붙인 이 상황에서 나는 자연스레 하나 남은 교재, 부르크뮐러로 관심이 향했다.
정식 명칭은 ‘부르크뮐러 25 연습곡’ 바이엘 중후반부~체르니 100과 병용해 치기 좋은, 딱 지금 수준에 알맞을 응용곡집이다.
피아노를 시작한 지 수 주가 지나도록 ‘연주곡’을 단 하나도 경험해 보지 않았다는 사실은 어쩌면 이 악기를 대하는 내 안일한 태도의 방증일지 모르겠다. 예술이 목적이 아닌 그저 기량 향상에만 포커스를 맞춘 기계적이고 삭막한 자세 말이다. 하지만 악기 연주는 감성 없이는 논할 수 없는 영역인 법. 바이엘이나 체르니 같은 연습곡을 아무리 파대 봤자 피아노 연주라고 칭할 만한, 쉽게 말해 ‘뽐내기 위한’ 레퍼토리로 써먹을 곡은 하나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부르크뮐러 25. 대강 훑어보니 앞부분의 몇몇 곡은 확실히 기억난다. 곡집의 1번부터 순서대로 각개격파 해나가는 방식은 예나 지금이나 좋지 않은 관습이지만, 당시의 학원 선생님의 커리큘럼은 그 관습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던 모양이다. 후반부의 곡들이 대부분 낯선 것도 분명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내가 월반이라도 한 것이 아니라면, 이 곡집을 한창 배우던 도중에 학원을 관둔 것이 틀림없다.
그래서 곡집의 맨 마지막에 실린 곡에 눈길이 머문 건 이상했다. 배웠을리도 없고, 기억에도 전혀 없는 ‘승마’라는 곡이다.
이 곡이 내 뇌리에 남아있는 이유를 떠올리게 된 건 사실 그로부터 훨씬 나중의 일이다. 고교 시절 즐겨 듣던 해외의 한 여성 솔로 가수가 어떤 기록 영상에서 이 곡을 언급하며 소감을 밝힌 적이 있었던 것. 그는 이 곡을 ‘귀부인의 승마’라는 곡명으로 소개했었는데, ‘승마’와 ‘귀부인의 승마’. 이 조금 어긋난 제목 탓에 내가 단박에 알아차리지 못했었던 것이다. 그는 아마 나와는 다른 버전의 악보를 갖고 있었거나, 애초에 해외판에서는 제목이 달랐을 수도 있다. 아무튼 그는 영상 말미에서 ‘얼마 전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이 귀부인의 승마를 잘 칠 수 있는 사람이라면 피아노를 이제 어느 정도 잘 친다고 자부해도 된다’라는 식의 코멘트를 덧붙였고, 나는 그 발언이 꽤 인상에 남았었다.
과연 맞는 말이다. ‘승마’는 리드미컬한 스타카토 도약과 양손 유니즌, 셋잇단음표, 붓점 등 다양한 테크닉이 복합적으로 등장하는 곡으로, 초급 연주자의 도전 과제로 손색이 없는 곡이라 할 만하니까. 자연스러운 음악 진행과 귀에 남는 멜로디 또한 인상적이어서 발표회용 곡으로도 자주 쓰이는 듯하고.
체르니 100을 제대로 소화해내지 못하고 안달복달하던 나는, 부르크뮐러의 처음 두세 곡을 그런대로 잘 쳐내는 것으로 자신감을 어느 정도 회복해 낸다. 물론 당장 ‘승마’에 도전하지는 않았다. ‘귀부인의 승마’가 곧 ‘승마’라는 건 아직 알아차리지 못했던데다, 애초에 내겐 아직 역부족인 곡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승마에 실제로 도전한 건 ‘귀부인의 승마’에 대한 일화를 떠올리고 나서도 또다시 몇 년 지난 뒤의 일이다. 우연히 그 가수의 영상을 다시 접한 어느 날, ‘지금이라면 도전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고, 나는 부르크뮐러 25를 다시 꺼내 들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꽤 수월하게 쳐낼 수 있었다. 음악적으로 완성된 연주였느냐는 별개의 문제였지만, 어쨌든 어떠한 형태의 성장이 그 몇 년 사이 있었던 것이다.
다만 그 가수의 말처럼 ‘피아노를 어느 정도 칠 줄 안다’고 스스로를 인정할 수 있게 됐느냐고 묻는다면, 아쉽지만 아니라고 해야겠다. 할 수 있는 것이 늘어날 때마다 할 수 없는 것은 그 배로 늘어나는 듯한 기묘한 감각만이 더 또렷해졌을 뿐(이 시기엔 이미 익숙해진 감각이다). 이는 인간 경험의 모든 영역에서 일어나는 현상일 테지만, 특히 배움이란 영역은 언제나 이런 방식을 통해 우리를 단련하는 듯하다. 지금도 여전히 나를 괴롭히고 있고, 아마 앞으로도 평생 따라붙을, 숙명적인 희비극.
그럼에도 내가, 그리고 사람들이 배움을 멈추고 싶어 하지 않는 이유는 뭘까. 논리로는 도저히 설명하기 힘들다. 무모하더라도 끝없이 나아가게 만드는 이름 모를 동력 같은 것이 세상에는 존재하나 보다, 하고 막연하게 납득해 볼 뿐이다.
나와 직접적으로 연결 고리가 없는 외국의 한 가수가 내던진 한 마디는 우연히 내 안에 날아들어와 오랜 세월 동안 자리를 잡고, 그것은 어느 순간 하나의 도전 과제로 모습을 바꾸었다. 그리고 나 스스로도 예상하지 못한 어느 순간, 과제는 저절로 완수되었다. 생각해 보면 내게 배움이란 늘 이런 식이 아니었나 싶다. 계획보다는 우연과 느낌에 의존한 체험. 이런 막연한 감성이 내 안에서는 항상 가장 확실한 추진력이 되어왔던 것이다.
아직 체르니 100 언저리에서 쩔쩔매는 수준의 나지만, 미래에 새롭게 체험할 또 다른 ‘승마’ 같은 곡이 내 안 어딘가에서 자라나고 있음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