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력에 대한 근거 없는 자신감은 초보 시절에 가장 강하게 그리고 빈번히 나타나는 법이고, 이것은 모티베이션 유지라는 측면 외에 성장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필요 이상의 자신감은 때로는 철저히 스스로를 깨부수는 경험을 겪게 하고, 결국 스스로를 성장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안일하게 도전한 곡에서 몇 날 며칠 허우적대고 씨름하다 결국 포기해 버리는 한 독학생처럼 말이다. 물론 내 이야기다.
소나티네.
작은 소나타라는 의미다. 보통 고전시대에 소나타 형식으로 쓰인 작품들 중에서 규모가 작고 연주 난이도도 비교적 쉬운 작품들을 지칭하며, 또한 그 작품들을 한데 모아놓은 악보집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한 ‘악보집’으로서의 소나티네라 하면 보통 쾰러(Louis Kohler 1820-1886)와 루트하르트(Adolf Ruthardt 1849-1934)가 독일에서 처음 편집하고 출판한 ‘소나티네 앨범’과, 이것을 기원으로 삼는 파생들을 일컫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일본에서는 이 오리지널 곡집에서 바흐 평균율 등의 몇 곡을 제외한 구성으로 새롭게 짜낸 악보를 오래전부터 초급 피아노 교재로써 활용해 오고 있다. 그리고 한국에서도 이 일본 판본을 거의 그대로 옮긴 악보가 수십 년 전 출판된 이후, 마찬가지로 초보 연주자들을 위한 교재로써 현재까지 널리 쓰이고 있다.
내가 소나티네를 어렸을 때 쳐 봤던가?
바이엘과 체르니, 부르크뮐러까지는 뇌리에 또렷이 남아있지만,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소나티네에 대한 이미지는 떠오르는 게 별로 없다. 연주 난이도로 따져 보자면 학원시절의 막바지 즈음엔 손을 대봤음직 한데도, 연주에 대한 어떠한 기억도 없는 걸 보아 관두는 순간까지 한 번도 배운 적이 없다고 보는 게 더 타당할 듯하다.
그렇다면 내 독학 피아노 여정에 있어서 ‘완전히 새로운’ 기념비적 첫 악보가 바로 이 세광판 ‘소나티네 앨범’이 될 터인데, 그중에서도 내가 첫 번째로 선택한 곡은 쿨라우의 작품번호 20번 중 1번 곡이다. 간단히 '소나티네 1번'이라고도 불리는, 이 앨범에 가장 첫 번째로 실린 곡 말이다.
사실 이 곡은 갓 피아노에 입문한 수준에서 도전하기엔 무리가 있는 난도의 곡이다. 보통 소나티네에 입문한다고 하면 7번이나 4번을 가장 먼저 선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그러나 나는 제일 첫 번째라는, ‘1번’이라는 숫자가 주는 뿌듯한 느낌에 무심히 이끌렸던 것 같다. 또, 나름 진도를 빨리 빼는 데에서 오는 자신감을 얻고 있었던 터라 조금만 연습하면 쉽게 정복할 수 있을 것 같아 보이기도 했고.
그리고 그 어리석은 생각이 곧 나를 엉망진창으로 깨뜨리게 된다.
도입부만 슥 훑어보자면 꽤 단조롭고 쉬워 보이는 곡이다. 초보자에게도 익숙한 다장조라는 점이 먼저 그렇다. 왼손을 살펴보자면, 으뜸화음 도미솔을 그대로 펼쳐놓기만 한 알베르티 베이스다. 코웃음이 나온다. 오른손 역시 왼손과 똑같은 으뜸화음 도미솔을 순서대로 얹어 가는 구조다. 와, 정말 단순해 빠졌잖아.
이 악보를 편집한 사람들이 왜 이 곡을 첫 번째로 실었는지 고개가 끄덕여지는 구성이다. 마치 전 세계 피아노 곡들의 데이터베이스라는 게 존재한다면 그 색인의 맨 첫 줄을 차지할 만한 곡이라고나 할까.
이 정도 수준은 지금의 내겐 일도 아니야.
그러나 그 수준은 첫인상과는 다르게 초보자에게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오른손과 왼손이 주제를 주고받는 교차 구성이나, 장단조를 넘나드는 잦은 조성 변화, 왼손의 낯선 옥타브 진행, 그리고 그중에서도 하이라이트인 쾌속 스케일 구간까지. 온순해 보였던 첫 몇 마디를 넘기면 곧장 해결해야 할 과제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첫 템포부터 잘못 잡은 내 손가락은 빠른 스케일 구간에서 속절없이 무너졌고, 왼손은 옥타브를 짚을 때 이미 갈길을 잃었다. 정말 정말 맛만 보게끔, 살짝 한두 군데 쓰인 페달 사인은 아예 눈길을 줄 여력조차 없었다.
그렇게 첫 두 페이지에서 며칠을 맴돌다, 결국 기브 업!
’일단 어려운 부분은 넘어가는 식으로 진행한다면야 완주하지 못할 정도 까진 아니었다‘
라고 허세를 부려 보아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것.
체르니에서 이미 한 번 좌절을 맛보고 나서는 그런 성취감 없는, 찝찝함만 남는 겉핥기식 도전은 하지 않기로 마음먹지 않았던가.
한 가지 위안 삼을 만한 점이라면, 조금만 연습하면 해낼 수 있을 법한 것과 당장은 아예 손댈 수 없을 듯한 것, 그 둘의 차이를 어느 정도는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
그리고 그게 사실이라면, 일종의 성장을 이뤘다고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미련이 남지 않았다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소나티네 1번이라는 벽 앞에서 나는 일단 단념하고 얌전히 다른 곡부터 도전하기로 했다.
그렇게 고른 곡은 7번 곡으로, 이른바 ‘소나티네 입문의 정석’인 클레멘티의 작품.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1번 곡보다는 훨씬 순조롭게 나아가고 있다.
소나티네의 첫인상은 내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찍먹조차 해보지 않은 첫번째 교재라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그것은 단순히 새로운 것에 대한 신선함에 그치지 않고 앞으로 도전할 곡을 고르는 데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칠 인상을 남겼지 않았나 싶다. 앞으로 내 앞에 펼쳐질 음악의 세계가 논리만으로 설계될 수 없는, 길고 낯설고 모호한 길이라는 건 어렴풋이 느끼고 있지만, 적어도 막연한 느낌만을 의지해 곡을 고르거나 하는 일은 없어야겠지.
물론 제 실력보다 한 두 단계 높은 곳을 향한 ‘규모 면에서의 도전’ 없이 진정한 성장을 기대하기는 힘들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지금은 향상에 대한 욕심보다는 좀 더 멀리 나아가기 위한 착실한 준비를 마련해 놔야 할 시기다.
자존심이 좀 상하긴 해도, 주제 파악과 겸손함이야말로 그 필수 재료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