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릴에서 다시 무너지다

by 익호

트릴. 그중에서도 길이가 긴 트릴은 바로크시대의 건반악기인 하프시코드 등의 ‘짧은 음 지속성’을 보완하기 위해 고안된 연주법이라는 게 통념이다. 국내외의 많은 음악 관련 권위자나 전문 연주가들도 하나같이 이런 식으로 트릴의 기원을 소개하고 있는 걸 보면, 이는 상당히 오래전부터 자리 잡은 정설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나는 트릴에 기원에 대한 이러한 설명이 일정 부분은 오해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생각하곤 한다.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하프시코드는 피아노만큼 음을 지속할 수 없는 악기였나?


바로크 시대의 대표적 건반악기인 하프시코드와 그 분류군들이 음가의 지속성이라는 측면에서 현시대의 피아노에 비해 뒤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다만, 피아노와 하프시코드 두 악기 모두 그 발음의 매커니즘에 따른 차이는 있다 해도, 결국 한 번 발음된 음가가 시간에 따라 서서히 사라진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물론 피아노에는 서스테인 페달이 있고 그것을 이용해 음을 지속시키는 게 가능하긴 하지만, 서스테인 페달은 18세기 후반에나 와서야 고안된 장치다. 게다가 비교적 현대에 개량되어 완성되기까지는 연주자나 작곡가나 피아노의 페달을 ‘특별한 효과를 위한 장치’ 정도로 여기는 경우가 더 많았으니, 수백년의 세월동안 피아노는 하프시코드에 비해 탁월하다 할만큼의 음 지속성을 갖춘 악기는 아니었던 것이다. 완성형에 가까운 구조를 갖추고 페달까지 장착한 모던 피아노의 출력만을 보고 하프시코드의 음 지속성이 떨어진다고 말하는 건, 대단한 오해와 저평가가 아닐 수 없다.


안 들은 귀 삽니다


인간의 감각은 비교를 통해 실제를 왜곡하곤 한다. 현대 콘서트용 피아노의 압도적인 음량과 페달링에 이미 익숙해져 있는 우리들의 귀엔 섬세하고 가녀린 하프시코드의 음색이 꽤 맥빠지게 들릴 수도 있겠다만, 당대 사람들의 ‘듣는 귀’엔 비교 대상인 피아노도, 음향 장비도 애초에 없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하프시코드와 그 친척 격인 여러 발현악기들의 음가도 그 시대 사람들의 청각에는 충분한 ‘지속성’을 제공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당대의 악기는 궁정이나 교회 등 그 자체로 건축적 음향 효과를 내는 장소에서 연주되는 경우가 많았기에, 발현악기라는 태생적 지속성의 한계도 공간적인 음향을 통해 많이 보완되었을 것이다.


트릴은 애초에 장식음이다


트릴이 오로지 짧은 음가를 해결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라면, 폐활량에 의해 긴 음가를 유지할 수 있는 관악기나 이론상 무한정으로 음가를 지속시킬 수 있는 현악기에도 트릴 주법이 존재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건반악기의 특수성을 고려해야 한다고 하기에도, 건반악기이면서도 음 지속 능력에 거의 제약이 없는 오르간이 이미 같은 시대에 존재했기에 쉽게 반박됨은 물론이다.


이러한 연이은 생각들로 인해 트릴 주법이 ‘음가 지속성의 보완’ 보다는 연주의 ‘음악적인 효과와 장식’으로서의 가치를 위해 고안된 것이 우선이라고 보는 편이 훨씬 납득할만한 설명 아닐까… 하는 결론에 이르렀다.

뭐 사실 이것 또한 지극히 개인적인 고찰일 뿐이지만 말이다.


왜 이렇게 트릴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가 하니…


최근 연습 중인 소나티네 9번 곡의 긴 트릴 패시지에 발목을 잡힌 상태라 그렇다.

손가락의 빠른 움직임에는 나름 자신이 있다고 자부했었는데. 특히 트릴처럼 ‘보여주는’ 테크닉에서 타협하고 싶진 않은데.

의욕만큼 좀처럼 깔끔한 연주로까지 이어지지 않는 현실에 좌절하고 있다.

세광판 소나티네 악보에는 주석을 통해 연주법이 제시되는 부분이 많다. 나는 그것에 쓰인 대로 ‘라시라^시라시^라시라^시라솔라’로 연주해야겠다고 처음부터 정했고, 그 결정에 일말의 의심도 갖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대로 연주하겠다고 순진하게 밝히자마자 레스너에게서 돌아온 한마디란…


‘… 뭘 또 참 많이도 갖다 붙이시네요.’

메세지 위로 떠오른 그의 질린 투에 굳건했던 자신감이 꺾여버렸다.

한참 옥신각신 한 끝에 ‘라시라^시라시^라시라솔라’ 정도로 타협하기로 했지만, 무척 자존심 상하게도 이마저도 손가락 돌아가는 꼴이 미덥지 않은 현 상황.

하루이틀의 연습으로는 나아지기는커녕 더 무너지는 듯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일까? 그랬으면 좋으련만.


트릴 구간에서 씨름하는 날이 이어지던 어느 날, 홀연히 내가 왜 굳이 스스로 멈춰서서 애쓰고 있는 거지 하는 의문이 떠올랐다. 이는 연습에 지친 나머지 내뱉은 체념에 가까웠을지도 모르지만, 트릴이란 게 ‘음악적 효과와 장식’에 그 첫째 의의가 있다는 믿음을 떠올려 놓고서도 실제로 치는 곡에서는 음가 그 자체에만 집중하고 있는 꼴이라니. 모순된 행동이 아닐 수 없지 않은가.


소나티네 9번 곡은 트릴 구간 외에도 해결해야 할 테크닉이 많다. 더하여 지금 나의 ‘음악적인’ 연주 수준으로 말할 것 같으면, 겸손을 쏙 빼놓고 이야기해도 아직 한참은 유치한 수준에 머물러야 할 것 같다. 만약 주석에 쓰인 대로 최대한 음표를 많이 욱여넣은 음형을 피나는 노력을 통해 체득했다 하더라도, 그 테크닉이란 현재 내 전체적인 음악에선 그야말로 돼지 목에 진주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이야기다. 수많은 음표가 진주알같이 흐르는 아름다운 트릴 연주는 일정 수준의 음악을 만든 후에야 비로소 어울릴만한 장신구 같은 것이고, 사실 그 수준에 도달하기 전에는 쓸데없이 노력해 봤자 충분한 테크닉을 체득할 일조차 없을 게 분명하다.

음악성과 테크닉, 이 둘은 완전히 분리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님을 먼저 알아야 한다.

지금 수준의 내가 그것이 진실임을 어렴풋이 눈치라도 챘다는 게 다행이라 해야 할까.


한동한 ‘안 되는’ 트릴 구간은 축소하거나, 그마저도 버거울 경우엔 아예 빼고 연주하기로 마음먹었다. 소나티네 9번의 긴 트릴 구간은 물론이고, 다른 곡들에서 줄기차게 등장하는 짧은 장식음들도 학습에 방해가 되는 경우엔 과감하게 생략하기로. 향상을 위해서는 어려운 테크닉을 자꾸만 접해 보고 도전해야 하는 것도 맞다, 그러나 막힌 한 마디에 너무 집착하기보다는 곡의 전체적 모양새를 아주 찔끔이라도 완성에 도달시키는 작업이 지금 내겐 더욱 유익하리라는 생각에서다.


성인이 되어 피아노를 친다는 것은 이렇듯 스스로가 자기 발목을 잡는 형국이 꽤 많다는 것을 실감하곤 한다. 어릴 땐 뭐든 별로 깊이 숙고하지 않고서 주어진 과제를 수행하거나, 혹은 때려치우거나 둘 중 하나였다. 어느 쪽이든 어떠한 거리낌이나 미련도 없었고, 그 덕에 편견이나 두려움 없이 척척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도 했던 것 같다. 물론 ‘깊이 생각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방식에도 장점은 여럿 있겠지만, 지금으로선 조금은 생각을 덜고 과감히 앞으로 나아가는 순진함이 더 절실하다. 부디 앞으로도 생각이 과해 그 무게에 짓눌려 중도 포기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keyword
이전 11화유튜브로 피아노를 배운다고?